그는 작품에 있어서는 불심 깊은 동승이 부처님 모시듯 지극 정성을 다한다. 비록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작품을 위해서는 좋은 재료들, 최고급 재료들만을 사용한다. 판화가는 몇 가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투자도 많이 해야 한단다. 판화를 찍어 낼 종이를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한지도 전부 자기네 것이 최고라고 얘기해. 하지만 그렇지 않아. 정말 좋은 한지는 비단결 같아야 되고, 표면에 윤기가 흘러야 돼. 만져봐, 푸석푸석하게 일어나지? 근데 이것 만져봐 부드럽지?” 이제 그는 한지 전문가가 다 되었다며 재료실에 쌓아놓은 여러 장의 한지를 꺼내 보이고 손수 만져 보이며 질 좋은 한지와 그렇지 않은 한지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또 그는 신중하게 고른 좋은 종이를 구입해서 바로 사용하지 않았다. “보통 종이를 최소 5년 동안은 그냥 재워뒀다가 써. 그냥 두는 거야. 그러면 종이가 더 좋아져. 거기에 판화 찍으면 더 좋고, 천년을 바라보는 종이지. 우리 옛날 문화라는 것은 천년을 바라보는 예술이었다고, 그것이 우리 조상들의 문화였는데 요즘은 뭐, 20~30년이면 당장 여기 이 책들도 벌써 시커멓게 된다고, 예전에 봤던 사회과학 서적들 벌써 시커멓게 됐다고. 서예가든, 판화가든 종이도 정말 좋은 걸 써야 돼.”

‘천년을 바라보는 예술’,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홍선웅 판화의 기본 정신이다. 그가 먹판화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 닥종이를 사용하면 오래 가긴 하지만 유성 판화는 아무리 한지에 찍어낸다고 해도 200~300년이면 삭는다고, 삭아서 떨어진다고. 아주 좋은 종이는 천년도 더 가는데 먹은 그 종이가 다 삭아서 없어져도 먹만은 남아 있다는 거야.” 바로 이런 이유로 당장에 200~300년도 채 못 내다보는 현대문화보다 멀리 천 년을 내다 본 우리 선조들의 문화에 뿍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장에 걸기에 더 예뻐 보이는 유성판화를 뒤로하고 먹판화를 찾아 나선 것이다. 팔만대장경판본이 있는 합천 해인사를 비롯해 안동의 고산서원, 병산서원 등 지방 곳곳을 답사 다니며 고판화들을 직접 찾아보고, 우리나라 판각 문화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점점 더 먹판화의 멋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 선조들의 장인 정신과 천년을 바라보는 예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고판화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가 또 하나 깨달은 것이 판의 소중함이다. 보통 현대 목판화에서는 작품 가치를 판화 그 자체에만 두기 때문에 그림을 모두 찍어낸 판은 X표시의 칼자국과 함께 버려진다. 판을 보관하는 판화가는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판각 문화에서 판의 가치를 알았다는 그는 다른 판화가들과 달리 판을 소중히 여기고, 소장까지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요즘 현대 판화가들이 주로 이용하는 베니어판을 멀리 하고, 유독 은행나무판을 고집한다. “베니어는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에 안 써. 은행나무는 단단하고, 잘 휘지 않아 보관하기도 좋고, 각도 깊이 새길 수 있지” 그의 판고에는 이미 그림과 글씨가 새겨진 판들도 있지만 그냥 네모 반듯하게 틀만 짜여진 은행나무 판들도 많다. 그는 판 역시도 최소 1년 이상 묵힌 다음에 사용한다. 그래야 더 잘 새겨지고 단단해 진다고 한다. 또 그는 은행나무 판이 휘어지지 않도록 판 양옆에 마구리까지 해서 보관하고 있었다. “판은 찍고 나면 내 것이 아니야. 후대의 것이지.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 내가 잘 보관했다가 박물관이나 그런 곳에 기증하면 우리 후대의 것이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야. 우리 후대들이 이 판을 보고 각을 보면서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판이 중요한 것이지. 팔만대장경판본을 버렸다면 우리가 지금 그 시대의 각을 어떻게 알 수 있나?”

홍선웅은 판은 어머니요. 대지라고 말한다. “찍어낸 판화만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판(板), 각(刻), 형(形) 모두를 중요시 여기며 조화롭게 발전시켜온 우리 선대 각수들의 폭 넓은 판각문화정신에 많은 감명을 받았지” 그래서 우리의 정서가 배긴, 좀더 우리다운 각을 내기 위해 그는 서양의 칼들을 이제 더 이상 쓰지 않는다. 그리고 조선식의 전통판화 기법을 배워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