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신돈』은 희대의 요승(妖僧)으로만 알려진 고려말 신돈에 대해 작가 특유의 재해석을 가한 야심작이다. <국어사전> 또한 무심코 왜말을 자주 그리고 많이 쓰는 우리 풍토에 대한 선생 특유의 비판적 문제의식이 역력한 작업이다. 그런 귀한 원고뭉치들을 잃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부처님이 '아직 때가 아니다'고 말하는 것 같유." 선생은 "원고를 잃기는 했지만, '미륵 부처님'을 얻지 않았느냐"고 덧붙인다. 잃어버린 원고가 아깝지만 <고쳐져야 할 왜말사전> 작업도 다시 시작했다. <아름다운 조선말>이라는 제목으로 모 월간지에 연재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왜 왜말이 문제인가. 선생은 "우리 고유의 사고 방식과 철학을 빼앗겼기 때문"이며, "영어 제국주의도 그 연속선상에 있다"고 말한다.

선생은 요즘 미륵불을 향해 향을 피우고 108배의 예불을 올리는 일을 하루도 빼놓지 않는다. 좌선과 바둑 그리고 신문지의 주식시세표 면을 모아 붓글씨를 연습하기도 한다. 주식시세표만을 골라 붓글씨를 쓰는 모습에서 어찌할 수 없는 작가의 '고집'이 느껴진다. 글쓰기가 막막할 때면 가까운 산을 자주 찾는다. 그 산은 6.25 전쟁 때 수많은 중공군이 아무런 외상도 없이 떼죽음을 당한 곳이라고 한다. 촌로들은 그 산이 6.25 전쟁 때 '세균전'이 일어났던 현장이라고 주장한다. 선생은 그 사실이 맞는지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에게 사실 관계의 조사를 부탁했다고 한다. 선생으로서는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6.25 전쟁의 비극을 온몸으로 '앓고 있는' 선생이 아니던가.

선생이 1983년 『문예중앙』에 연재하다 필화 사건을 겪은 『풍적』은 '유다의 핏줄'과도 같은 좌익2세의 한과 슬픔을 불교적 연기관이라는 큰 생명의 차원에서 융합한 작품이다. 올해 출간된 황석영의 『손님』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망령'과의 대화를 선구적으로 시도했던 것이다. 선생은 『풍적』에서 전쟁 발발 직후 예비 검속으로 대전형무소에서 희생된 부친과 그 세대의 헌걸찬 정신을 이으려는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선생은 이 작품으로 인해 "멍이 들대로 든 사람"이 된다. 끝내 미완성으로 그쳤지만, 분단문학의 대표작으로 남은 『풍적』의 운명은 어찌 될까. "신명이 나야 쓰지."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담배를 빼어물며 말을 잇는다. "잡지사에서 몇몇 문제가 되는 대목을 빼자고 했지. 근데 이빨과 발톱을 솎아내는 일은 절대 못하겠다고 버텼지.……나로서는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는 심정으로 썼지…."

선생은 늦가을쯤 양평 작업실을 떠난다. 강원도 평창의 '해피 700m'에 자리한 터전으로 옮길 작정이다. 인간의 욕망이 수굿하게 수그러든다는 700m의 산중턱 1,000여 평을 싼 값에 빌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그곳에 20평 남짓한 흙집을 짓고 '고루살이'를 시도할 구상이다. "세상이 막막하고 슬픈 사람들의 객실(客室)이랄까, 십시일반으로 힘 닿는 대로 해보자는 것이지. 떨리는 꿈, 소박한 첫발로……."

한 마디 한 마디 힘이 넘치고 사상가의 풍모마저 보이는 선생과의 만남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선생과 명정(酩酊)의 거리 밖에서 이토록 진지하고 뜨거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문득 밖을 보니 아직 여름 해는 길기만 하다. 이제, 선생의 표현대로 '음주 전투'를 벌여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아, 나의 온몸은 갑작스런 긴장감에 휩싸인다.

* 뱀의 다리: '음주 전투'의 현장에서 있었던 '에소피드'(에피소드×, 김성동 선생식 표현―선생에 따르면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쓰더라도 '조금씩 비틀어서' 쓰겠노라는 의지 표현이다. 이런 사례는 숱하게 많은데, 몇 개만 예를 든다; 운동권=Health권, 김지하=지하당, 환장=환경장사꾼 등등)를 자세히 옮겨 적지 못함을 용서하시라. 예상보다 짧게(?) 4시간 만에 끝났지만, 한없이 유쾌하고 격조가 넘쳐났던 '음주 전투'의 전황 보고는 붓과 혀[筆舌]를 놀리는 재주가 턱없이 모자란 필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