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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의 장편소설 <화두>가 막 출간되었을 무렵이다. 어느 날 민음사에 잠깐 들렀는데 마침 내 옆에서 편집부 직원이 한 독자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네, 화두란 일단 한자 그대로 풀면 어떤 이야기의 말머리라는 뜻이 되는데요, 원래 이 말은 불가(佛家)에서 나온 말로서… 그러니까… 스님들이 참선 수행을 할 때… 그러니까…”
최인훈의 소설 <화두>라는 제목이 무슨 뜻이냐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편집부 직원은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해 주고는 있었으나 무언가 스스로도 매끄러운 전달은 안 되고 있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자꾸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건 말주변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화두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은 느닷없는 질문이어서 그렇기도 했으리라. 책이 나가면 이런저런 문의 전화가 많은 법이지만 소설 제목의 뜻을 물어오는 경우란 많지 않을 터.
<화두>는 확실히 소설 제목으로는 낯설고 독특하다. 아주 어려운 단어라곤 할 수 없지만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은 분명 아니다. 작가는 왜 이 소설에 화두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제목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만 소설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 제목이란 내용을 요약한 목차와는 달리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경우 화두란 말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적어도 이 소설을 대하는 마음의 준비에는 도움이 될 듯도 하다.
직접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작가는 소설 속에서 화두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물론 사전적 해석이라기보다는 작가 자신이 이 단어, 이 제목, 이 소설에 부여하고자 했던 의미라 할 것이다.
“…지식인들의 정신생활의 소식을 가장 내면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개념이 이 <화두>라는 용어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이미 틀 지워진 기성의 개념들을 벗어나서 마음의 생성과 변화를 거슬러 가보려는 결의가 내비치는 말이다.”
이 말에 따른다면 화두란, 작가가 오늘의 자기 정신이 있게 한 어떤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오르려는 의지 혹은 그 작업을 뜻한다. 한 마디로 이 소설은 작가가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성찰하며 20세기의 문명과 사상을 되짚어 보는, 좁게는 분단 시대를 사는 이 나라 지식인의 입장과 작가 자신의 예술관에 대하여 집요하게 사유해 보는 글이라 할 수 있다.
그 사유는 주로 최인훈 자신의 개인(가족)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추천되었던 회갑 나이의 작가가 자신의 기억을 더듬고 추스르며 그 갈피마다에 담긴 의미를 최대로 확장시켜 20세기가 지닌 사상적, 문화적 토대를 찾으려 한다. 이는 어느 평론가의 표현처럼 ‘작가가 살았던 20세기, 20세기인의 운명 풀이에 관한 어떤 매듭’을 짓고자 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쯤 말하고 보면 우리는 이 소설이 흔하게 만날 수 없는 묵직한 소설임을 느끼게 된다. 확실히 이 소설은 작가 최인훈의 진지한 사유의 정신이 돋보이는 ‘큰’ 소설이다. 가벼운 흥밋거리에만 익숙해 있는 독자라면 ‘참을 수 없는 무거움’으로 다가올 소설이다.
그런데, 소설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문학성을 가르는 절대 기준은 아니라고 본다면, 특히 감동이나 공감이 소설의 내용적 무거움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면, 이 소설이 지닌 기본적 중후함과 문학적 감흥은 별개의 문제이다.
사실 그 점에 대해서도 여러 시각이 많은 듯하다. 내 주변에만 보더라도 아주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읽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아 1부의 중간쯤에서 손을 놓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래놓고는 1부만 먼저 사서 읽어보면 좋았을 것을 한꺼번에 두 권을 다 산 것이 후회막심이라고 투덜거린다.
독자들의 반응이란 언제나 다양한 법이지만 이 소설은 주제와 분량과 작가의 명성이 묵직하다 보니, 또 사전에 워낙 매스컴과 광고 등에서 요란하게(?) 걸작의 탄생을 예고했던지라, 소설을 좋게 읽은 쪽이나 그렇지 않은 쪽이나 그 독후감도 사뭇 요란하기 그지없다. ‘사상과 예술의 대교향악’이라는 표현이 그 한쪽을 대변하는 말이라면, ‘소설 이전의 것’이라는 차가운 일침이 다른 쪽의 대표적 독설이다.
그러면 나는? 나는 또한 나대로 읽고 감상할 뿐이다, 모든 다른 독자들처럼.
내가 이 책을 사게 된 계기는 대개의 독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뭐냐 하면, 광고나 기사에서 이 책을 소개받는 순간 당연히 사서 읽어야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당시 민음사의 주간이던 이영준 씨는 어느 자리에서 ‘이 책은 무조건 사 두어야 된다는 압박감이 느껴지도록’ 공세적 광고 전략을 펼쳤다고 말한 바 있는데, 결과적으로 그 공세적인 광고 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어찌 그것이 광고 때문만이겠는가. <광장>의 작가인 최인훈이 20년의 침묵을 거쳐 제목부터 심오한 화두라는 소설로 다시 나타났을 때, 소설에 약간의 관심이라도 있는 독자라면 주목하는 게 당연하다.
아무튼 나는 소설 <화두>를 어떻게 읽었던가?
앞에서 약간 익살스럽게 이 책을 사게 된 계기를 말했지만 사실 나는 처음부터 큰 기대와 반가움을 가지고 이 소설을 대했었다. 일급 지성 작가의 눈에 비친 이 시대, 이 세계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적어도 소설에 있어서는 은둔자와도 같이 살아온 최인훈이 이제 20년을 묵혀 펼쳐 보이는 사유의 광장은 과연 무엇을 담고 있을까, 나는 그런 기대와 설렘으로 소설의 첫 장을 펼쳤다.
어설픈 애송이 작가에게 무언가 세계를 읽는 지침이 되어 주기를, 나의 빈곤한 의식을 재무장시켜 주기를, 그리하여 잔뜩 기죽어도 좋으니 머리에 들이붓는 찬 물처럼 나를 바짝 긴장시켜 주기를, 예컨대 그런 기대였다.
결과는? 우선 이 책은 술술 읽혀지는 맛이 없어 나를 다소 맥 빠지게 했다. 처음 몇 십 페이지는 흥미롭게 읽어 나갔는데 초반부를 지나면서부터 조금씩 심드렁해졌다. 소설의 주제에 크게 기여할 것 같지 않은 개인적 신변잡기들이 다소 장황하게 서술돼 있다는 느낌이었고,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되는 면이 있었고, 이야기의 갈래가 방만해진다거나 곳곳에서 자주 맥이 끊기고는 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런 서술 방식을 택했다고 하는데, 글을 쓰고 자기 기억을 추스르는 작가 입장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독자에게 유연하게 다가오는 방식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연극적인 대화, 철학적 단장 등의 독특한 구성도 그것이 소설 형식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자유로운 글쓰기라는 점에서는 의미 있겠지만 막상 독자들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을지 선뜻 긍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런 점들이 이 소설의 실패한 부분이라고 강하게 주장할 마음은 없다. 그것은 작가의 서술 방식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어차피 술술 읽히고 안 읽히고의 문제는 한 작품의 문학성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존중하는 게 있다면 나와는 달리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읽은 그 의견들이다. 내가 이상한 독자가 아니듯 그 사람들도 이상한 독자는 아닐 것이므로.
그러면 이 소설의 어떠한 점이 이처럼 독자의 반응을 가르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 소설뿐 아니라 대개의 소설들이란 게 그러한 운명을 지닌다. 취향의 차이, 안목의 차이, 책을 읽게 된 동기의 차이 등에 따라 그 독후감이 달라지는데, 이 소설의 경우 나는 그 차이를 ‘지적 감수성’의 차이라고 부르고 싶다.
무슨 말인가 하면, 취향이나 안목이나 소설을 읽게 된 동기도 비슷한 사람끼리 그런 차이가 있다고 할 경우, 이는 결국 작가 최인훈의 사유 스타일에 대한 개인적 교감의 문제가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한 번 더 풀어서 말하면, 화두라는 이 소설은 결국 최인훈 개인의 지적, 정서적 편력기이고 그 고백인데, 그 고백을 듣는 사람의 지적, 정서적 감수성과 호흡이 일치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일 거라는 말이다.
대개 한 소설의 주된 내용이 작가의 지적 사유이고 그러면서 동시에 작가의 어조나 표정까지가 고스란히 그 소설에 투영되는 경우, 그 소설과의 교감은 작가와 독자의 사유 스타일이 얼마나 비슷한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화두>와 꼭 같지는 않지만 진지한 사유나 분방하고 독특한 형식에서는 얼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쿤데라의 <불멸>도 그런 경우라고 본다.
내 경우는 <불멸>을 아주 재미있게 읽은 편이다. 그러나 주변에 보면 그 소설을 심드렁하게 읽은 독자도 꽤 많다. 그 차이가 나로서는 앞에서 말한 ‘지적 감수성’의 문제라고 여겨진다. 옳고 그름이 아니고 우열의 문제도 아니고, 다만 교감의 호흡 문제인 것이다.
소설 <화두>에 나오는 단상 한 구절로 그 예를 들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예컨대 최인훈이 미국의 광야를 지나가다가 문득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자동차 여행을 하면, <지평선의 감각>이랄 만한 것을 맛보게 된다. 인간이 돌멩이를 들고 짐승을 쫓다가, 문득 이 초원의 한복판에 멈춰 섰던 50만 년 전 어느 여름 한낮이 되살아난다. 아메리카의 자연은 이런 환기력을 지닌다. 넓이란 어느 한계를 지나면 인류학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위 구절은 나에게 깊고 생생한 공감을 주었다. 그런데 조금 아래의 다음과 같은 단상을 보자.
“마흔 살 넘으면 넓이의 유혹도 오래가지 않는다. 고향에 두고 온 부모처자만큼 넓은 넓이는 없기 때문이다. 율리시스는 밤마다 이타카의 꿈을 꾼다. 꿈속에서 페넬로페의 젖가슴은 로키산맥처럼 다가온다. 나그네에게는”
이 구절 또한 은은한 향기와 나름대로의 지적 사유가 담겨 있는 부분이기는 하나 적어도 나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조금 단순하게 예를 들었지만 아무튼 이런 식의 교감 여부로 <화두>에 대한 내 전체 인상을 말해 보면, 이 소설에 그려지는 사유 방식이나 서술 구조가 적어도 내게는 그다지 맛깔스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 소설을 통하여 의식을 재무장한다거나 지적 긴장감을 느낀다거나 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요즘 쉽게 만나기 힘든 풍부한 사유의 광장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책의 어느 부분을 펼쳐도 섬세하고 진지한 사유가 촘촘하게 박혀 있어 읽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그것을 우리는 사유하는 정신의 아름다움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진지한 사유는 그 자체로 휴머니즘이 되고 미학이 된다. 이 소설엔 그런 의미에서의 휴머니즘과 미학이 있다.
요즈음 나는 이 책을 다시 읽고 있다. 처음부터 읽는 게 아니라 불쑥 책의 아무 장이나 펼쳐들고는 거기에 흐르는 사유에 담담하게 동행하곤 한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원숙한 선배로부터 인생 경험을 듣듯 그렇게 오롯이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면 확실히 새로운 맛이 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어두면 어쨌거나 소득이 되는 법. 더욱이 그것이 나름대로 이 세계와 치열한 정신적 대결을 벌여온 당대 일급 작가의 말이라면 옷깃 여미고 경청해 봐야지 않겠는가. 최인훈은 그만한 품격의 작가는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