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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禁書가 있게 마련이다. 그 시대, 그 나라가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이 금서가 되는데, 일반 독자의 정서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아 자발적 항의의 표시로 금서가 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위정자들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경우는 책의 출간이나 판매는 물론이요 그것을 읽는 독자마저 처벌받게 된다. 그러나 위정자가 일방적으로 금한 책일수록 독자들은 오히려 애써 찾아 읽으려고 한다. 결국 이 경우의 금서란 위정자와 국민간에 사상의 대립의 한 상징이 되는 것이다.
정치적 후진국일수록 금서가 많다. 국민(독자)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억제하고 획일적인 가치관만을 강요하는 비민주적인 태도가 금서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서의 내용이나 수량은 한 사회의 정치적 수준을 짚어 보는 주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정치적으로 우울했던 우리의 7,80년대에도 수많은 금서가 있었다. 노태우의 6.29 선언 이후 6공 정부와 문민정부로 이어지면서 지금은 그 중의 상당수가 풀려 있는데, 그렇게 풀린 책들 중 글쓰기와 관련된 책 한 권을 살펴보자.
이태준의 <문장강화>가 그것이다. 이태준은 193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소설가로서 당시 시인 정지용과 함께 문단의 쌍벽을 이루었던 작가이다. 이 글은 원래 1939년 이태준이 주관하던 <문장>지 창간호부터 연재되다가 나중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그러니 책이 처음 나온 때로부터 벌써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80년대에 많은 젊은이들이 숨어서 돌려가며 읽었던 이 책은 사실 그렇게 은밀하게 읽어야 할 만큼 사상적인 무엇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다. 이념이니 사상이니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 책이 금서가 되었던 이유는 단지 저자인 이태준이 월북작가라는 데에 있었다. 내용이야 어찌되었건 월북한 작가의 글이 이 땅에 돌아다녀선 안 된다는 경직된 의식이 이 단순한 문장 작법 책을 오래도록 금서로 묶여 있게 했던 것이다.
하기야 덕분에 이 책은 은밀하게 떠돌면서 문장 작법의 한 고전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니, 이것도 새옹지마라 불러야 할지 아무튼 다소 쓴웃음이 나오기는 한다.
이 책이 유명해진 데에는 분명 금서라는 위치도 한몫을 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으나 무엇보다 이 책 자체의 내용이 금서의 세월을 이겨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즘 수능시험이다 논술고사다 해서 수많은 글쓰기 책이 나와 있으며, 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본격 소설 작법 책도 제법 여러 종류가 된다. 그런 책들과 이 <문장강화>를 비교한다고 할 때 이 책을 가장 뛰어난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글쓰기 기술에도 여러 변화와 발전이 있게 마련이고, 또 요즘 책들은 나름대로 다양한 기획을 통해 실용성을 높이려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다른 많은 책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맛을 지니고 있다.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나 좋은 문장에 대한 애틋한 관심은 딱히 이 작가에만 있다고 할 것은 아니니 넘어간다고 쳐도, 적절한 예문과 그 예문에 대한 간결명료한 해설은 단연 돋보인다. 무엇보다 예문으로 제시되는 글들이 지금은 보기 힘든 글들이 많아 읽는 맛을 한층 감칠맛 나게 해 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한 평자가 ‘예문의 풍부함은 신문학 20년이 도달한 우수한 성과를 집결해 놓았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확실히 독자는 이 책을 통해 풍속 기행과도 같은 독특한 재미를 맛볼 수가 있다.
예컨대 소화 12년 <조선일보>에 실렸다는 다음과 같은 기사의 예문은 별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자체로 하나의 추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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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또 가능하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고자 애씀으로써 글쓰기를 공연히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는 미덕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생각할 만한 단순한 점들을 다루기도 하는데, 저자의 진솔하고 명쾌한 해설을 통해 우리는 그 단순한 점들을 통해서도 글쓰기의 헛점이나 혹은 중요한 원칙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다음과 같은 예를 보자.

진지-잡수셨습니까?
진지-잡쉈습니까?
진지-잡수셨어요?
........
진지-잡수셨수?

저자는 이렇게 단순한 예문 몇 개를 죽 늘어놓고는 다음과 같이 구수한 해설을 붙이고 있다.

“다 밥 먹었느냐 묻는 말이다. 그러나 말이 가지고 있는 신경이 다 다르다. ‘잡수셨습니까?’ 하면 ‘까’가 몹시 차고 딱딱하고 경우 밝고 도드라진다. ‘잡쉈수’는 너무 텁텁해서 사십 이상 마나님의 흉허물없는 맛이 난다. ‘잡수셨에요’나 ‘잡수셨나요’는 휘우뚱하는 리듬이 생긴다. 날씬한 젊은 여자의 몸태까지 보인다.”

앞에서 ‘신문학 20년이 도달한 성과’라는 인용글이 있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예문 중에는 아마 지금은 다른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그 시절의 다양한 글들이 많다. 그래서 일부분만 인용된 예문들을 읽다가 문득 전문을 다 읽어보고 싶어 안타까울 때도 있다. 그것은 각 예문들이 그 자체로 맛과 향기를 지니고 있어서이다.
수필을 다룬 장에서는 짧은 글이다 보니 몇 개의 수필이 전문으로 인용돼 있기도 한데 하나같이 읽어 볼 만한 글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상용의 <그믐날>과 정지용의 <비>를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김상용의 <그믐날>은 저자의 설명대로 ‘우스우나 얼른 잊혀지지 않는’ 해학적이면서도 왠지 가슴 뭉쿨해지는 수필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어떤 견해 중에는 지금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도 다소 있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한자어를 ‘교양어’라 부르며 어떤 단어들은 역시 한자어를 써야만 품(品)과 풍치가 살아난다고 하는 견해는 쉽게 동의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저자가 예문으로 든 어느 글의 한 구절을 보자.

인류는 본래 자연의 따스한 품에 안겨 토향(土香)을 맡으면서 손수 여름지이를 하던 것이니 이것이 신성한 생활이요 또 생활의 대본(大本)일른지 모른다.
이른바 운수(雲水)로써 향(鄕)을 삼고 조수(鳥獸)로써 군(群)을 삼는 도세자류(逃世者流)는 좋은 것이 아니나 궁경(躬耕)의 여가에......

이태준은 <영하만필>이라는 이 산문집 중에 나오는 글의 한자어를 모조리 속어로 바꾸어 놓으면 글의 품격과 맛이 현저하게 손상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엔 예문 자체가 오히려 생동감이 떨어지고 향기도 없어 보인다. 이는 아무래도 서당 세대가 지니고 있는 한자어의 남다른 애착일 것이다.
저자는 또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면서도 한편 외래어와 신어의 사용에 대하여 퍽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도 한데, 이 역시 당시 서구 문물에 취해가던 지식인들의 일반적 조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이런 점들은 지금으로선 그다지 받아들일 만한 견해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물론 이 몇 개의 흠이 이 책의 가치나 멋을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꼭 글쓰기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이 책은 한번쯤 읽어 볼 만하다. 문장 원리에 대한 소박하고 진솔한 견해도 그렇지만, 다양한 옛 글의 예문들을 통해 반 백년 전의 정서를 맛보는 일은 뜻밖의 기쁨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