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속도로 달리면 시간은 정지하고 죽음도 면하겠죠.”
“그럼 공간은 일그러지고.”
“회귀하게 되죠. 지금 가야 할 곳으로.”
“이 차에는 지금 삶에 거역하다 파멸된 것들, 상처받아 불구가 된 것들, 혹은 사살된 욕망들이 있죠. 아시겠어요?”
“어느새 달리는 장의차에서 공동묘지가 됐군요.”
“공동묘지… 하지만 신생을 꿈꾸는 공동묘지.”

무슨 실험 연극의 대사 같기만 하다. 아무래도 억지로 만들어 낸 대화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고, 어쩐지 어설픈 치기마저 느껴진다. 내가 보기엔 화자의 심리 묘사나 전개되는 상황 전반이 지나치게 감상적 상상력에 지배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못마땅했던 점 또 하나를 이야기하자.
이 소설의 첫머리에는 ‘빌리 홀리데이’라는 흑인 가수가 나온다. 노총각으로 보이는 소설의 화자 ‘나’가 쓸쓸한 저녁 거실에 앉아 이 가수의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빌리 홀리데이라는 가수를 모른다. 그래서 조금 찜찜해졌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몇 가지 더 생경한 단어들이 이어지고 있다. ‘에드워드 커티스’라는 사진작가, 이 사진작가의 ‘호피인디언’이라는 작품, ‘아르누프 라이너’라는 전위 화가. 그리고 뒷부분의 어느 대화 중에 보면 (이 중에는 친숙한 이름도 몇 개 있었지만) 한꺼번에 우르르 낯선 이름들이 등장하고 있다. 엘뤼아르, 슈바이거, 짐 자무시, 고흐와 뭉크, 마리아 칼라스와 마이크 올드필드… 등등이다.
위의 이름들은 모두 인물의 심리나 가치관 그리고 전개되는 상황과 일정한 관련 속에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 단어들 모두를 알고 있어야만 소설을 읽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것들은 작가가 연출하고자 하는 분위기의 소도구들이므로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여러 차례 낯선 단어들과 만나다 보면 슬그머니 불만이 이는 걸 어쩔 수 없다. 또한 독자로서는 자신이 소설 공간에 충분히 합일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누적되면서 괜히 께름해지기도 한다. 소설 내용의 깊이에서라면 작가 나름대로 어떤 생경한 사상과 철학을 펼쳐도 좋겠지만 인물과 정황 묘사라고 하는 기본적인 소통 과정을 이렇듯 낯선 용어들에 의존해도 되는 것인지 나로선 선뜻 동의되지 않는다.
사실 근래의 적지 않은 소설들이 현란하고 생경한 많은 외래문화 용어들을 구사하고 있다. 딴은 시대적 감각에 충실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이제 ‘달빛 같은 눈매’식의 묘사는 분명 촌스럽다. 적어도 이 시대에는 ‘영화 <일식>의 모니카 비티를 연상케 하는 눈매’식의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또 무언가 스산하고 비장한 상태를 표현하려면 ‘나는 <8번가의 암살>에 나오는 그 거리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독자가 <8번가의 암살>을 보았거나 말거나(보았을 리가 없지, 그런 영화는 없으니까) 이제는 그렇게 표현하는 게 좀더 세련되어 보이고 시대감각에도 맞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불쑥 조급해지기도 한다. 이제 소설을 제대로 쓰려면 부지런히 이런 문화부터 섭렵해야 되는 건 아닐까, 부지런히 컬트영화들을 찾아다니고, 젊은 나이로 요절한 가수의 음반이라면 무조건 들어두고, 전위적이라거나 이단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모든 아티스트들의 신상 명세를 조사해 두어야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조급증이다. 야유하자는 건 아니다. 줄줄이 외래 용어들이 차용되는 현란한 소설들을 읽다 보면, 이 작가들이 너무 안이하게 시대감각을 따라가는 건 아닐까 불쑥 의구심이 들곤 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 두 가지, 상황 전개나 묘사를 낯선 외래문화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점과, 다소 감상적이라는 점이 내가 이 소설에서 느낀 불만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일 ‘진정성’이라는 면에서는 나를 안심시켰다. 약간의 감상이 흠이긴 하나 이 소설 안에는 분명 작가의 진지한 가슴앓이가 담겨있다. 소설의 주요 부분마다에서 이 작가는 자기가 추구하는 걸 적확히 표현해내고자 무던히 고심한다. 그 추구는 소설 안의 문장을 빌어 말해 보면 ‘허위와 속임수와 껍데기뿐인 욕망’의 이 삭막한 현실로부터 인간의 원초적인 진실이 살아있는 ‘존재의 시원’으로 거슬러 오르고 싶다는 그런 욕구인데, 그것의 의미와 가능성의 분석은 비평가들의 몫으로 넘긴다 하더라도 이 작가의 진지한 몰두만은 독자의 가슴에도 어렵지 않게 느껴져 온다.
윤대녕은 분명 자기 몫의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그 진정성은 이 작가가 지닌 약간의 감상성을 충분히 상쇄시키는 미덕이라 여겨진다.
이제는 이 소설의 밀교적 공간, 지하 창고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고 싶다. 아마도 그건 이 소설에서 말하는 ‘존재의 시원’을 탐색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이유로 지하 창고에 자기들만의 공간을 만들고 있는 걸까? 이들은 여기서 무엇을 얻는 것일까?
지하 창고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실내에는 둥글게 원을 형성하고 떠 있는 수십 개의 촛불이 있다. 어두운 편이나 안온한 느낌은 있다. 그리고 풀이 타는 냄새와 함께 술내가 코끝에 진하게 묻어난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술잔을 들고 누워 있거나, 반라가 되어 서로 껴안고 있거나, 기타를 치고 있거나, 혹은 촛불 밑에서 책을 읽거나 하며 그림자처럼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먼저 최인훈의 회색구락부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최인훈의 단편 <그레이구락부 전말기>였다.
내가 그 소설을 읽은 게 벌써 20년 전이다. 지금도 그 책은 눈앞 책장에 꽂혀 있지만 다시 읽지는 말고 어렴풋한 기억만으로 되짚어보고 싶다. 그게 오히려 이 소설과의 대비에는 효과적일지 모른다.
회색구락부는 주택가 중의 한 가정집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모이는 사람들은 이 소설의 지하 창고 그룹보다는 젊은 층이었지 싶은데, 그들은 특별한 약속을 정하지 않고 드나들고 있었다. 구락부 안에서의 모습들은 대체로 이 소설에서와 비슷하다. 혼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가끔 소리 높여 토론을 벌이거나 했다. 그들 사이엔 무언가 비장한 열기가 있었다.
그 회색구락부는 어떻게 종말을 맞이했던가? 어느 날 이웃에서 경찰에 신고를 했다. 수상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시도때도 없이 드나들고 있는데 아무래도 간첩들의 거점 같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이 신고 때문에 모두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된다. 그 경찰 조사가 이 구락부의 종말 서곡이다.
너희들 그곳에 모여 무슨 음모를 꾸민 거야? 아무 일도 안 했다니, 젊은 사람들이 일도 없이 모여서는 멍하니 앉아 있다 돌아갔다니, 그게 말이나 돼!
경찰은 대충 그런 식의 질문을 퍼부었다. 젊은이들은 추상같은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자유, 일탈, 초월, 막연한 그리움, 까닭 없는 비장감, 은은한 평화, 경찰의 단선적인 추궁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정서를 해명할 어떠한 말도 찾아낼 수 없었으리라. 하기야 경찰은 경찰대로 답답했을 게 틀림없다. 어쨌거나 젊은이들은 한바탕 곤욕을 치렀는데, 그러나 특별한 혐의가 없고 보니 무사히 훈방되었다.
막상 훈방은 되었으나 그들은 고뇌하기 시작한다. 지극히 논리적인 경찰의 질문에 대하여 스스로 어떠한 변호도 할 수 없었다는 점으로 해서 그들은 자신들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속에 과연 허위는 없었는가? 우리의 열정은 가짜가 아니었을까? 대충 그런 식의 고뇌였다. 결국 그 소설이 보여주고자 했던 건 그 시대 젊은이들의 정서를 지배했던 일상과 일탈, 허위와 진실, 이성과 정념, 이러한 명제들에 대한 혼란스러운 의식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최인훈의 회색구락부와 윤대녕의 지하 창고는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 걸까?
두 소설을 비교 분석하자는 게 아니니 구체적인 대조는 그만 두자. 다만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회색구락부 사람들에 비해 지하 창고 사람들이 좀더 당당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지하 창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와 목표에 대하여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당당한 확신으로 해서 이 지하 창고 그룹은 좀더 종교적이고 좀더 음모적이다. 동시에 그만큼 단선적이다.
좀더 종교적이라는 부분이 바로 윤대녕의 강점일 것이다. 이 작가는 순진하면서 진지하다. 진실에 다가서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끈질기게 자기를 몰고 간다. 그래서 종교적이다.
좀더 단선적이라는 부분이 윤대녕의 약점일 것이다. 이 작가는 주로 감상적인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을 뿐 날카로운 이성을 작동시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단선적이다.
이제 말해 보자. 우리는 윤대녕을 신뢰해도 좋을까? 기꺼이 이 작가를 따라 어둠침침한 지하 창고로 내려가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도 좋을 것인가?
일단 나는 더 지켜보고 싶다는 쪽이다. 나는 윤대녕을 ‘진지한 감상파’라고 부르고 싶다. 그런데 그 진지한 감상파 윤대녕이 이끄는 세계가 나에겐 아직 불투명하고 미심쩍다. 하지만 지켜볼 마음은 있다. 윤대녕은 관심을 갖고 주시해볼 만한 정도의 매력은 지니고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