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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번엔 통속 소설 좀 읽어봅시다!”
무슨 대단히 신선한 발상이라도 떠올랐다는 듯 한 사람이 큰 목소리로 제안했다. 가까운 문우들끼리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소설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에서였다.
사실 신선한 제안이기는 했다. 우리가 이제까지 토론 대상으로 삼았던 소설들은 대개 일정한 주제 의식이 담긴 작품들, 이른바 ‘본격 문학’ 혹은 ‘순수 문학’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참 우습게도, 그 제안이 나오자 사람들은 무슨 야유회 계획이라도 나누듯 갑자기 싱숭하게 들떠 올랐다. 통속이라는 단어 속에는 사람을 긴장시키지 않고 편안하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우리 모임은 모처럼, 아니 처음으로 통속 소설을 다루게 되었다. 우리는 이번 기회에 예전의 베스트셀러를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해방 전후에 크게 인기를 모았던 <순애보>와 <청춘극장>과 <찔레꽃>을 골랐다.
워낙 유명했던 작품들이므로 우리는 모두 이 제목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한두 명 빼고는 모임의 대다수가 이 작품들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한번 더 싱숭해졌다. 마치 낡은 서랍 속에서 우연하게 보물 지도라도 발견한 기분들이었다.
우리는 먼저 두 사람의 발제자를 정했는데, 나는 그 두 명 중의 한 발제자로 지정 받았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나는 이번의 통속 소설 읽기에 대하여 나름대로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기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스트레스 해소이다. 한때 장안의 종이 값을 올렸다는 이 베스트 통속 소설을 통하여 모처럼 신파적 감상에 물씬 젖어보고자 했다.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신나는 재미에만 푹 빠지는 것도 정신 건강에는 필요하다. 다른 기대 하나는, 통속의 세계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순진성, 단순무쌍한 열정, 파란만장한 세속 정서를 통해 내 자신을 조금 순화시켜 보자는 것이었다.
순화?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사실 나는 이제까지의 내소설이 너무 진지하고 무겁기만 했던 것은 아닌가 스스로 반성해 보던 참이었던 것이다.
어찌 진지함만으로 세상을 다 느낄 수 있으랴? 어찌 고상한 정신만으로 인간사의 무수한 희노애락 그 미세한 마음의 결을 짚어낼 수 있으랴? 나는 그러한 마음으로 최근에는 애써 통속적인 정서에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었다. 예컨대 진지한 정신은 유지하되 그것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분석하는 그런 진지함이어선 안 되리라는 나름대로의 겸허한 반성이었다.
아무튼 나는 발제를 위해 먼저 통속의 개념을 생각해 보았다.
通俗이 무엇이지? 새삼스레 궁금하여 사전을 뒤적여 보니, ‘세상에 널리 통하는 일반적인 풍속’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까 두루두루 통하고 두루두루 이해되는 가장 일반적인 정서요 관습이 통속이라는 말이겠다. 결국 단어의 뜻 자체만 가지고 말하기로 하면, 통속은 일단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사회적인 그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전의 바로 아래에는 ‘통속문학’에 대해서도 따로 설명하고 있었다. ‘문학적 교양이 비교적 낮은 일반 대중을 위하여 쉽게 알 수 있도록 흥미있는 소재에 중점을 두고 평이한 내용을 다룬 문학’이 통속문학이란다. ‘통속’의 설명이 가치 중립적인데 비해 ‘통속문학’의 이 설명엔 약간의 폄하가 깔려 있다. 재미있다.
그러니까 ‘세상에 널리 통하는 일반적인 풍속’을 다루면 무언가 낮은 문학이 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냥 ‘문학’ 혹은 ‘본격문학’이 되려면 무엇을 다루어야 되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다.
일단 이 정도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토론 대상 작품 중의 하나인 <순애보>를 펼쳤다.
<순애보>는 1938년에 <매일신보>가 당시로서는 거금인 현상금 일천 원을 걸고 모집한 장편 소설 공모에 당선된 작품이다. 이 소설은 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해방 이후까지 총 47판을 찍으며 기록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작가인 박계주는 이 소설 하나로 일약 유명 인기 작가가 되었다.
자, 그러면 내가 읽은 <순애보>는 어떠했던가?
내 겸허함이 부족했던 것일까, 나는 도저히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발제자의 책무감이 있어 그저 건성으로 넘기며 겨우겨우 반쯤 읽었을 뿐이다. 그리고 발제를 포기했다. 도대체 나로선 뭐라 덧붙일 말이 없었다.
나와 함께 발제를 맡았던 다른 사람도 사정은 비슷했던 모양이다. 다만 그 사람은 나보다 좀더 책임감이 강했다. 그래서 발제를 준비해 왔는데, 다음은 그 발제문의 일부분이다.
“…비록 내가 나이 들고 세상의 풍파에 시달렸지만, 나는 무언가 그윽하고 고전적인 사랑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싶었다. 그것이 비록 통속적인 것일지라도. 그러나 세상에! 나는 이렇게 재미없는 책을 만난 게 정말 오랜만이다. 책장 한 장 한 장을 넘기기가 지겨울 정도로 곤욕스러웠다 … 순애보는 한 마디로 통념의 감옥에 갇혀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작품이었다. 너무 단순하고 상투적이어서 아예 소름이 끼치는 인물들, 뻔한 줄거리, 개연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우연의 남발, 진정한 고뇌와는 거리가 먼 작위적인 사랑 이야기, 형편없는 문장…”
순애보와 함께 읽은 나머지 두 소설은 이 작품보다는 조금 나았는데, 유치하고 따분하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모임이 있던 날 통속 문학에 대하여 오래도록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름대로 통속 문학의 가치를 인정하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접근했었기에 우리들의 실망은 더 컸다. 우선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때 수십만의 독자를 열광시킨 작품이 이렇듯 지루하고 유치하게만 다가온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 까닭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 논의의 결론은 결국 ‘세월’이었다.
그런데 이때의 세월이란, 그 동안 소설들이 발전했다거나 독자들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면도 약간은 있겠지만 실상 하나의 문학 작품을 평가할 때에 시간은 그리 중요한 변수가 못 된다. 고대 희랍 시대의 작품을 비롯하여 허다한 고전들이 수백,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추앙 받고 있지 않은가. 결국 이때의 세월이란, 그 작품이 세월을 견뎌내기엔 많이 허약한 일회용 작품이라는 뜻이다.
사실 어차피 통속 소설로 알고 접근했으니 그 작품이 거창한 무언가를 남겨주지는 않아도 좋다. 다만 재미만은 여전히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인데, 통속 소설이란 한 시기를 지나면 그 재미조차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새롭게 느낄 수가 있었다.
이 소설을 다시 읽으라면 차라리 화장실 청소를 대신 하겠다던 아까의 그 발제자는 발제문에서 다음과 같이 통속 소설을 규정하고 있다.
“통속적인 소재를 가졌어도 통속 소설이 아닌 것은 많다. 똑같이 여성의 외도를 다루고 있더라도 <안나 까레리나>는 명작이며 <자유부인>은 통속 소설이다. 똑같이 순애보를 다루고 있더라도 <좁은 문>은 명작이며 <순애보>는 껄렁한 통속 소설이다. 무엇이 그것을 구분 짓는가? 통속 소설이란, 소재가 줄거리에만 관련을 갖고 줄거리로만 닫혀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통속이 아닌 작품에서 소재란 하나의 재료일 뿐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끌어내기 위한 말 그대로의 재료일 뿐이다.”
그렇다. 통속 소설이란 줄거리의 흥미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소설이다. 그 흥미만이라도 남아 준다면 또 모르겠는데, 세월은 그 흥미마저 갉아먹는다. 왜냐 하면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표피를 살짝 건드리며 당대의 얄팍한 정서에만 의존하고 있기에 세월을 견디지 못한다. 세월이 흐르면 독자의 정서와 현실 인식이 변하기 때문이다.
결국 통속 소설이란 떠돌이 약장수의 너스레 같은 것이 아닐까?
듣는 순간은 달콤하고 재미있기만 하여 다른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판단력을 잃고 대뜸 가짜 약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약장수만 떠나고 나면 벌써 후회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품안의 약은 병을 낫게 하기는커녕 복통이나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사려 깊게 돌아봐야 할 것은, 그렇다면 현재 우리 주변에는 어떤 통속 소설들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 통속이란 단지 소재나 줄거리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지닌 삶의 통찰력의 문제이다.
한 작가의 가치관이나 의지가 통속적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 다루는 주제가 어떠하든 통속 소설로 끝나고 만다. 정의와 평화를 주제로 사회 변혁을 이야기하는데, 페미니즘을 표면에 내걸며 여성의 정체성 회복을 주장하는데, 거창하게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부르짖으며 애국심을 호소하는데, 그 결과는 얄팍한 통속에 그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통속 소설일수록 최면 작용이 강하여 순간적인 감흥은 격렬할 수가 있다. 통속적인 전개는 독자의 정서 표면을 직접 두드리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래서 누가 자기가 읽은 소설을 통속 소설에 불과하다고 말하면 독자는 저자보다 오히려 더 화를 낸다. 자신이 받은 감동이 모욕당했다는 생각에서이다.
하지만 그 감흥이 깊게 남지 못하고 한순간의 도취로만 끝나게 될 때, 다시 말해 한순간 결연한 결심을 하게 만들거나, 울컥하는 흥분을 주거나, 감미로운 동병상련의 정서를 만들어 주기는 하나, 정작 그것이 독자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까지 침투해 들어가 그 삶을 질적으로 변화해내는 데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 소설은 현란한 포장지에 쌓인 허섭쓰레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문제이면서 또한 독자의 문제이다. 독자가 스스로 주체적인 성찰을 열망하지 않는 한 숱한 통속 소설의 그물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스스로 경계하지 않는 한, 차라리 통닭이나 한 마리 사 먹는 게 나을 돈으로 통속 소설 한 권을 읽어내고는 무언가 문화적 시간을 즐긴 듯한 내실 없는 도취에나 빠지기 십상이다.
가끔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 나는 그 말을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그 사람이 자기 말에 담긴 함정 하나를 알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재미란 말초적인 자극으로만 얻어지는 건 아니다. 세익스피어를 재미있게 읽을 수도, 사르트르를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다. 가끔 보면 자신은 안목을 높일 생각 없이 통속의 맨바닥에 주저앉아 있으면서 소설만 자꾸 밑으로 내려오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소설의 재미를 강조한다. 문학에서의 재미란 서로 다가가 만나는 것이지 누가 일방적으로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