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십여
년 전에 인기 여배우 윤정희가 주연한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 포스터의 광고 문구가 내 흥미를
바짝 끌었다.
‘서울 1964년 겨울, 드디어 영화화!’
대충 이런 식의 구절이었다. 그때 나는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대하여 광고 문구
그대로 ‘드디어!’라는 감회를 느꼈다. 이 소설에서 받았던 인상적인 분위기가 영상으로는 어떻게
표현될지 퍽 궁금했던 것이다. 쉽지 않을 텐데,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영화는 그러면 어쨌느냐 하면, 실망스럽게도 이 소설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아니, 원작의 작가가
같다는 점은 있었으니 실오라기 하나만큼의 관계는 있었던 셈이다. 그 영화는 <서울 1964년
겨울>이 아니라 김승옥의 다른 소설인 <야행>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였다. 그래놓고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 김승옥의 대표작인 엉뚱한 소설을 팔아먹은 것이다. 지금 어렴풋이
기억나기로는 당시에도 그 광고 문구가 문제되어 사람들로부터 약간의 빈축을 들은 것으로 안다.
어쨌거나 나로선 이 소설을 영상으로 만나보고자 했던 기대를 채울 수 없었다. 내가 못 봤는지는
모르지만 소설을 원작으로 만드는 텔레비전의 단막극 같은 데에서도 이 소설은 한번도 다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이 소설을 영상으로 만나보고 싶어했던 건 이 소설의 장면들이 영상적이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지극히 비영상적이다. 우선 소설 속에 그려지는 공간이 포장마차를 비롯해 몇 장소에
불과하며 전개되는 상황도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게다가 인물들 사이에 별다른 갈등도 없으니 사실
영화로 만들기에는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다.
그래, 내가 만나고자 했던 건 그 분위기였다. 축축하고 음울하고, 그러면서 한편 무언가 바삭바삭
부서져가듯 건조하기 이를 데 없던 분위기. 그러고 보면 나는 그 영상을 이미 보고 있었다. 대개
잘 쓰여진 소설은 장면 장면이 하나의 영상으로 남아 독자의 머리에 인각된다. 이 소설에서도 상황을
묘사하는 문장 자체는 평범하다. 어떻게 보면 너무 단순하다. 그럼에도 매 장면이 꼭 영화로 본
듯 선명하게 남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특정 장면의 묘사가 아니라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다. 단순하게 분위기라고
말했지만, 그 분위기 속에는 당연히 피부로 체감되는 인물들의 삶과 시대 상황이 담겨 있어야만
한다. 그랬을 때 하나의 소설은 독자가 마치 그 공간 안에 같이 숨쉬고 있었던 것 같은 선명한
인상을 남겨주게 된다.
그러면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은 무엇이었지? 시대 상황은 또 무엇이었지?
이제 소설을 들여다보자. 우선 제목이 인상적이다. 서울이고 1964년이고 겨울이라? 1964년에
나는 일곱 살에 불과했다. 그리고 서울에 살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 소설의 공간은 일단 나에게는
멀다. 하지만 나이 좀 지긋한 분이라면 이 소설의 제목만으로도 자기 나름대로 어떤 분위기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독자들 자신이 떠올린 그 분위기가 정작 이 소설의 분위기와 일치할는지는 나야 물론 알 수
없는데, 아무튼 소설은 다음과 서두로 1964년의 서울을 그려내고 있다.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밤이 되면 거리에
나타나는 선술집 - 오뎅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 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카바이트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 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 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주고 있는 그러한 선술집에서,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우연히 만났다.
불현듯 거리로 나가 막소주라도 한잔 걸치고 싶게 만드는 글이다.
이러한 겨울밤의 분위기는 사실 4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다만 몇
가지 역시 시대적인 차이라고 할 부분이 있는데, 예컨대 지금의 포장마차에서는 카바이트 불빛이나
군참새 요리는 보기 어려울 터.
아무튼 이러한 선술집에서 세 명의 남자가 우연히 만나게 된다. 구청 병사계에서 근무하는 스물다섯
살의 평범한 청년, 같은 나이의 대학원생, 그리고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요컨대 가난뱅이라는
것만은 분명하여 그의 정체를 꼭 알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는’ 서른댓 살짜리 사내이다.
선술집에서 우연히 같은 자리에 앉았다는 것말고는 공통점이라고는 없는 이들이 나눌 수 있는
대화란 어떤 게 있을까? 이들은 언제 자리를 털고 일어날까를 궁리하며 건성으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각기 자기만 안다고 생각하는 은밀한
사건들 - 사실은 자폐적인 사람이나 기억하고 있을 아주 시시한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평화시장 앞에 줄지어 선 가로등들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덞 번째 등은 불이 켜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고 나자, 상대는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지만 그러나 이내
기쁜 표정이 되어 다음과 같이 받는다.
“서대문 버스 정거장에는 사람이 서른두 명 있는데 그 중 여자가 열일곱 명이었고, 어린애는
다섯 명, 젊은이는 스물한 명 노인이 여섯 명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놀라고, 이어서 비슷한 이야기들을 신이 나서 지껄이기 시작한다. 단성사
옆 골목의 첫 번째 쓰레기통에는 쪼코렛 포장지가 두 개 있다거나, 적십자병원 정문 앞에 있는
호도나무의 가지 하나는 부러져 있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들이다.
이들이 세상사 모든 것을 시들하게 보면서도 이런 시시한 이야기에는 집착하는 까닭은 그 사실들이
오로지 ‘나만의 것’이라는 데에 있다. 세상에서 나만 유일하게 알고 있는, 그리하여 온전히
나에게 소속되고 내 재산으로 남아 있는 것. 이런 심리의 밑바닥에는 1960년대의 젊은이들이
겪는 자기 정체성의 위기, 가치관의 혼란이 스며 있는 것이다. 자유의 극점을 맛보았던 사일구와
그 무상한 좌절인 오일륙, 60년대를 여는 격동적인 이 두 사건이 젊은이들 가슴에 남긴 허망감,
무기력, 냉소주의, 그런 것들.
두 청년의 이런 우울한 정서와 대비되는 또 하나의 정서가 있다. 서른댓 살의 가난뱅이 사내이다.
서적 월부 판매원인 이 사내는 죽은 아내의 시체를 해부 실습용으로 병원에 팔고는 그 자책감에
괴로워한다. 청년들의 갈증과 허무감이 대체로 정신적, 이념적인 차원의 것이라면 사내의 고통은
전적으로 먹고사는 문제의 물질적인 차원이다. 그리하여 이 두 부류의 정서는 표면적으로 전혀
다르게 나타나면서 서로 거리감을 느끼지만, 그러나 이 두 모습은 모두 1960년대 우리 사회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는 이들 세 사람이 추운 겨울의 밤거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먼저 사내가 제안한다.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오늘 저녁에 다 써 버리고 싶은데요.”
두 청년은 “멋있게 한번 써 봅시다.”라고 웃으면서, 그러나 여전히 힘없는 음성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세 사람은 중국집에서 요리를 시켜 술을 마시고, 양품점에 들러 비싼 넥타이를 하나씩 고르고,
귤을 사 먹고, 화재 현장으로 택시를 몰고 가 불구경을 한다. 사내는 거기에서 남은 돈 전부를
불더미 속으로 던져 버린다. 그리고 세 사람은 여관으로 들어가 이 건조하고 황량한 밤을 마감한다.
다음 날 아침, 두 청년은 사내가 간밤에 죽은 것을 알게 된다. 자살이었다. 청년들은 소리
없이 여관을 빠져나온다. 거리엔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청년들은 헤어지기 전에 쓸쓸한 목소리로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김형, 우리는 분명 스물다섯 살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두 그건 분명합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그 뭔가가, 그러니까...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스물다섯에 이미 겉늙어 버린 두 청년과, 서른다섯의 창창한 나이에 낯선 여관방에서 삶을 버리는
사내, 이것이 김승옥이 보여주는 1964년 서울의 겨울밤이다. 한국 문학사에 걸작으로 남아
있는 이 단편 소설은 우연히 어울린 세 남자의 스산한 하룻밤을 통하여 1960년대의 우울한
시대상을 비추어 주고 있다.
김승옥은 세 인물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간결한 문체로 툭툭 건드리면서도 인물들의 심리와
서정적인 분위기를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이는 세상을 바라보고 통찰하는 작가 시선의 문제일
것이다. 한 작품의 문학성이란 무엇보다 작가가 어느 만큼 세상을 깊이 있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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