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문제작에 대한 초유의 전복적 책읽기. 완전 무삭제 수록.
총 265권에 예리한 비평의 메스를 가한 장정일의 육성 보고서!

이 구절을 읽다 보면 광고에서 카피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이 든다. 독서에 조금이라도 취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문안이다.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광고 카피에 현혹(?)되어 책을 사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주된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일기’라는 형식이기 때문이리라.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하여 언급한 글들은 여러 형태가 있다. 보통의 독후감이 있고, 본격적인 비평문이 있고, 책 소개에 주안점을 둔 서평이라는 형식이 있고, 인터뷰나 좌담을 통해 언급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일기라? 일기라는 형식은 왜 독자의 관심을 유도할까?
우선 저자가 독자를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솔직한 느낌을 기술했다는 점이 마음을 끌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이외의 다른 글들엔 거짓이 섞여 있다는 건 아니지만, 일기에는 아무래도 좀더 솔직한,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자기 느낌이 아주 생생하고 거침없이 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잘 정리된 본격 비평문보다 오히려 공감하기 쉬운 면도 있고, 동시에 그 거침없는 표현을 통하여 어떤 카타르시스도 맛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일기라는 형식은 그 저자의 내면 정서를 만난다는 맛이 있다. 예컨대 책을 읽어내는 저자의 표정, 숨결, 욕망, 그리고 일상적인 습관이나 평소의 인간관계까지도 얼추 엿볼 수 있게 된다. 결국 독자들은 다양한 책의 정보만이 아니라 그 저자의 내밀한 성격과 욕망까지도 간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나 또한 그런 이유로 해서 이 독서 일기가 모 잡지에 연재될 때부터 흥미롭게 읽고는 했었다. 그런데 막상 단행본으로 엮어져 나온 뒤에는 별로 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돈 주고 사서 읽기에는 조금 아쉬운 면들이 많이 있어서였는데, 지금 이 글이 ‘장정일의 독서일기’라는 책을 흠잡기 위한 글은 아니니 그 이유들은 생략하겠다.
그 대신 오늘은 다른 비슷한 책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평론가 김현이 쓴 <행복한 책읽기>라는 책이다. 이 책은 일기 형식의 책으로서는 실상 장정일 책의 원조라 할 수 있으며, 내가 보기엔 장정일의 독서 일기보다 훨씬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김현은 십여 년 전에 작고한 문학 평론가로서, 예리한 비평 안목과 섬세한 문체로 우리나라 문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문학인이었다. 이 책 <행복한 책읽기>는 1986년에서 1989년까지의 김현의 일기인데, 저자는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까지 이 일기를 다듬고 보완하며 자신의 마지막 저서로서의 애정을 주었다고 한다.
이 책에는 김현이 읽은 수많은 다양한 책들이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감성과 안목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그밖에도 문학예술과 관련된 일상적 생활들이 일기라는 형식 그대로 진솔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일기니까 진실이고 다른 형식의 글은 가짜인 것은 아니지만, 역시 일기에 담긴 글들은 좀더 솔직하다. 그 생각이나 느낌이 즉발적이고 꾸밈이 없다.
사실은 그래서 진실과 거리가 멀 수도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진중하게 정리되지 않은 평가는 자신의 타성적인 편견이나 일차적인 감성에 의존되기 쉬우므로 어떤 면에서 저자 자신의 진짜 사상과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노라면 이 저자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평론에서는 어떻게 비평을 했었는지 문득 궁금해지며 평론을 찾아다가 비교해 보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은 날의 일기이다.

소설 속에서 제일 극적인 것은 고모/조카간인 정하섭과 소화의 사랑이며, 그 외의 것은 눈에 익은 정황이다. 살아 생동하는 부분은 염상진의 부인이 취조 받는 장면이며,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하섭이 소화에게 비파 두 개를 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정치의식의 깊이에선 김원일을 따르지 못하고 있으며, 스케일의 크기에선 박경리를 따르지 못하고, 낭만적 사랑의 울림에선 김주영을 못 따른다. 더구나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이 너무 비범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읽힌다.

이 책에는 김현이 알고 지내는 여러 문인들이 등장한다. 독자들은 대개 문인이라는 사람들은 서로 무슨 대화를 나누고 그 일상 생활이 대충 어떠한지 등에 대하여 궁금해하곤 하는데, 이 책은 그런 궁금증을 충족시키는 데에도 일조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부분들.

4시경에 복거일씨가 들렀다. 언제 봐도 깔끔한 차림인데, 수줍어하기는 계집애보다 더 하다. 그의 이야기 중에 들을 만한 것 하나: 가난한 사람들의 환부는 눈에 금방 띄지만 진짜 아픈 부분은 몸의 다른 곳이다. 그곳을 보지 못하는 한 총체성은 얻어지지 않는다. 사회라는 거대한 몸속의 가장 아픈 부분은 정치와 돈이 만나는 자리이다.
그의 두 개의 계획: 어렸을 때 자란 파주 근방의 기지촌을 중심으로 한 중편 하나, 그리고 예비군 훈련에 관한 이야기 하나.
“기지촌 이야기를 쓰려면 걸리는 것이 참 많아요. 우선 제 아버님만 해도 살아계시거든요.”

이미 읽어 본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위 일기에 나오는 ‘기지촌’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해 전에 책으로 나왔다. 이 일기가 1987년 1월의 일기이니 복거일은 101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야 그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이다. 한 작가가 꼭 쓰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묵는다. 불현듯 세월의 유수 같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소설을 쓰는 데에 은근히 걸린다던 이 작가의 아버님은 돌아가신 걸까?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일기라기보다는 독서 메모에 좀더 가깝다면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는 독자가 그 내면의 정서에 동화된다는 점에서 좀더 일기적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에 배인 어떤 애틋함.

서유석이 부른 <타박네>를 댓번 듣고 있으면 , 가슴이 묘한 슬픔으로 가득 찬다. 내 가슴 속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그렇게 뿌리깊게 박혀 있었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슬픔이 목젖까지 차오르면, 어머니가 보고 싶다! 외치고 싶다. 누구에겐가 가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 때, 추하다, 45세의 장년이여!

이 책을 읽다 보면 새겨들을 만한 좋은 구절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래서 무슨 잠언집을 읽는 기분이 되기도 한다. 한편 어떤 면에선 명상집이요, 수필집이다. 하기야 일기란 그 모든 것의 복합체가 아니겠는가. 한 인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기억과 느낌이, 모든 사상과 철학이 일기에는 담겨지는 것이다. 몇 부분을 함께 읽어보자.

1986.2.25.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불안감에서 해방되려 한다. 위대한 선동가는 그것을 이용하여 우선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것을 해소하는 가장 손쉬운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이 축제로 변할 수 있을 때 혁명은 완성된다.
1986.9.30
미국 영화가 자꾸만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은, 미국의 지적 힘이 자신감을 잃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자기 나라가 좋은 나라라는 것을 선전해야만 안심이 되는 나라는 이미 그렇게 좋은 나라가 아니다.
1988.8.8
나는 항상 옳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나는 항상 잘못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앞의 사람은 투사이고 뒤의 사람은 종교인, 예술인이다. 나는 항상 옳다라고 말하는 자부심 없이는 싸울 수 없고, 나는 항상 잘못한다라고 사유하는 사람의 원죄성 없이는 느낄 수 없다.

이 책은 꼭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불쑥 아무 꼭지나 펼쳐 거기에 펼쳐지는 저자의 사유에 담담히 동행하면 좋을 것이다. 이미 작고한 이 섬세한 문학평론가와 더불어 지금 이 순간 차 한 잔을 나누며 담소하고 있다는 기분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