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내게 일상을 떠난 삶의 변주이다. 일상을 떠난다는 것, 생각보다 꽤 큰 쾌감이 일었다. 빡빡하던 일상이 어찌나 까맣게 잊혀지던지. 낯선 얼굴, 낯선 풍경이 빚어내는 생경함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고, 그간 온전히 나만을 위한 휴식 시간을 갖는 것에 나 자신이 얼마나 야박하게 굴었는지 알 수 있는 계기였다. 나는 허겁지겁 그 자유 시간을 끌어안느라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히말라야 봉우리들을 보지 못하고 죽으면 원통할 거라는 친구의 말도 있었지만, 왠지 그곳에 다녀오면 나를 가두고 있는 속박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것 같은 기대감에서 네팔 행을 감행했다.
   트레킹보다는 그곳에 온전히 나를 맡겨보고 싶은 욕구가 컸다. 웅장하게 펼쳐진 히말라야 봉우리들을 보며 내안에 미련을 떨며 웅크리고 있는 것들을 떨쳐내겠다는 각오도 컸다. 히말라야 봉우리들을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담푸스 산정을 향해 걸었다.
   가파른 산길이돌계단으로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맨몸으로 올라가기에도 무척이나 버거운 산길이었다. 올라가는 도중, 나무를 머리에 걸고 산길을 오르는 네팔 여인들을보게 되었다.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묵직한 생나무를 이고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저 나무를 날라야 가족들에게따뜻한 밥을 해먹일 수 있을 것이다. 억척스레 논 갈고 밭 매고 나무하던 우리네 어머니 같아 길을 비켜주며 마음 한 구석이 짠했다.
   사람이 살지 않을 것 같은 산 능선마다 밭이 있고 논이 있었다. 그들에게 이 산길을 오르내리는 일은 일상일 것이다.그 척박함 속에서도 낯선 이방인에게 스스럼없이 반갑게 인사하는 그들의 눈빛은 하나 같이 선했다. 먹구슬 같은 까만 눈동자에는 어떤 삿된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며칠 후 경비행기를 타고 네팔 상공을 날 때 그들의 숙명을 알 수 있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이라 그 산에서 먹을 것을 구하고 그 산을 경작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공에서 바라본 네팔 땅은 마치 실지렁이가 고운 모래흙에 지나간 자리를 그려 놓듯 계단식 논과 밭이 즐비했다.
   겨울이라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봄, 가을에 해당하는 날씨였다. 유채꽃이 만발한 밭도 있고 올라가는 산길마다,갖가지 들꽃이 발길마다 부려져 있었다.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 꽃과 생김새가 비슷한 꽃들을 보며 정서적 연대감이 일기도 했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그들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먹구슬 같은 눈동자를 닮은 구슬붕이였다. 짙은 청보라 꽃빛이 어찌나 오묘하던지,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땅바닥에 바짝 붙어 피어나는 구슬붕이는 햇빛이 드는 곳이면 어김없이 피어 있었다. 땅에 박힌 보라빛 별이었다. 척박한 환경이지만 나름대로 그곳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네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극한의 물질만 갖고도 순박함을 잃지 않는 그들의 욕심 없는 삶이 구슬붕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새 봄이 오면 우리 고장의 상당산성 양지바른 곳에는 구슬붕이가 제일 먼저 봄맞이를 할 것이다. 차가운 봄바람에 몸을 낮추며 땅위를 보랏빛 별로 수놓을 것이다. 구슬붕이를 보며 네팔 담푸스 올라가는 길을 떠올릴 것이고 그곳의 자연환경에 순응하며 착하게 사는 네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 (20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