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지금이 가을이에요, 겨울이에요?”

   아홉 살짜리 학생이 대뜸 물었다.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나도 지금이 어느 시기인지 잘 모르겠어서이다.

   “글쎄, 늦가을 아닐까? 아니면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간절기일수도 있고.”
   “네? 지금 12월이에요.”

   그러고 보니 정말 12월이었다. 내 대답 속에는 아직 계절을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어 있고 계절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날씨 탓도 있다. 해동하는 봄 날씨 같은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즈음이면 어렸을 적엔 문고리에 손이 쩍쩍 들러붙을 정도의 추위가 찾아오곤 했는데, 아이도 그것이 의아해서 물었을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2040년에는 북극의 얼음이 사라져 북극곰을 볼 수 없고 새로운 바닷길이 열리며 해수면이 높아져 육지가 줄어드는 등 지구의 지형이 바뀔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러한 자료를 학생들에게 보여 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북극의 얼음이 녹을 때면 제 나이가 몇인가부터 따지는 것이다.

   “에이, 나 살아 있을 때잖아.”
   이 한 마디면 끝이다.

   따뜻한 날이 계속 이어지다가 찬바람이 불자 그예 하얀 눈이 펑펑 쏟아졌다. 시선 끝에 걸리는 산자락마다 하얀 쌀가루가 시루떡을 안칠 때처럼 뿌려져 있다.

   친구와 눈 덮인 상당산성을 오르며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었다. 날이 겨울답지 않게 춥지 않아 걱정이라고, 세상살이가 갈수록 팍팍해진다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도 어렸을 때부터 경쟁에 내몰려 원래 세상살이는 팍팍한 것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라는 뭐, 그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산성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따뜻한 햇볕 아래 녹은 곳도 있지만 대부분 하얀 눈 천지이다. 눈 아래는 내년에 살아갈 풀들이 파란 잎을 내놓고 있을 것이다. 춥겠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눈을 이불처럼 덮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햇볕 탓이다.

   가지만 삐죽빼죽 남은 철쭉꽃은 꽃 떨군 자리마다 하얀 눈꽃을 달고 있었다. 탐스럽게 벌어진 목화를 보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보았던 고향 마을의 목화밭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졌다. 지금은 사라진 내 서러움의 근원지였던 목화밭, 새삼 그곳이 그립다.

   동문 밖 오솔길에는 산새들이 연신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가며 울고 있고 커다란 다람쥐 한 마리가 먹이를 찾으러 길가로 내려오기도 했다. 이렇게 눈이 덮였으니 어디서 먹이를 구할까. 막막하겠다. 하얀 눈 속에서 빨갛게 빛나는 찔레열매가 이들에게 얼마나 반가운 존재일까. 새들에게는 사랑의 열매가 따로 없겠다.

   눈 덮인 오솔길을 걸으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덧 욕심으로 득시글거리는 마음 때문에 눈꽃 속을 걸어도 그 아름다움을 모른다.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일도 모레도 모자라는 사람처럼 또 그렇게 어리석게 살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눈밭에 서서 이렇게 넋두리하듯 속 풀이 하고 있다. 세상사 걱정거리 다 짊어진다고 해결되는 것도 없다. 차라리 내려놓는 게 신상에 편하다. 그것도 쉽지 않을 터, 그냥, 그 어리석음도 인정하고 가야겠다. 그게 삶이다. 눈꽃 속을 걸으며 그거 하나 내려놓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