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겨울, 담양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서 흰눈을 이고 있는 푸른 대나무와는 대조적으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우람한 줄기만 자랑하던 관방제림의 나무를 보게 되었다.
    관방제림은 조선 인조 때 수해방지를 위해 해마다 제방을 수축, 방풍을 위해 700여 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조성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400여 그루의 나무가 남아 있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는 177그루로 번호를 붙여 관리하고 있다. 팽나무, 느티나무, 푸조나무, 음나무 등, 품이 꽤 넓은 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관방제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웠다. 1번부터 177번까지 한 그루 한 그루 얼마나 소중한지 가슴마다 달고 있는 명찰이 말해주는 듯 했다.
   관방제림 양쪽으로 즐비하게 서 있던 나무들을 보며 여러 번 탄성을 지른 기억이 난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를 한꺼번에 여러 그루 보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사람을 압도해 오는 우람한 나무둥치로 멋들어지게 길을 수놓고 있는 나무의 의연한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 옛날 관에서 직접 조성한 길이라고 하니 담양군에서 풍겨나는 멋스러움이 절로 느껴졌다. 우마차 한 대 다닐 정도의 길로 조성된 이 길을 보존하기 위해 차량을 통제하고 새로 길을 낸 최초의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그 해 겨울 그 길을 걸으며 그랬다. 연둣빛 새 순이 오른 관방제림은 얼마나 멋있을까, 신록이 우거진 관방제림은 또 얼마나 생명력이 넘쳐날까. 그럴 때 꼭 한 번 다시 오고 싶다고.
   그러다 며칠 전 기어이 관방제림을 다녀오게 되었다. 녹음이 짙어가는 관방제림은 그야말로 생명의 잔칫집 같았다. 족히 삼사백 년 된 나무들이 일제히 양 팔을 늘이며 푸른 싹을 틔운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1번 나무부터 눈도장을 찍으며 관방제림 둑길을 걷기로 했다. 가족단위로 소풍 나온 사람들이 나무 그늘 아래 도시락을 먹기도 했고 여러 개의 평상 위에는 사람들이 한가로이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낮잠을 즐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낮잠이 쏟아질 것처럼 편안한 풍경이었다. 관방제림 아래는 담양천이 다소곳하게 흘러 그 운치를 더해주었다.
   친구들과 함께 그 길을 걷다 평상에 누워 보았다. 얼마 만에 가져 보는 느긋한 한 때 인가. 나뭇잎 사이로 얼비치는 햇살은 새로 나온 이파리를 투명하게 만들며 신록으로 신록으로 가고 있었다. 햇살의 바쁜 걸음걸이가 나뭇잎마다 닿아 있었다. 널따란 푸조나무 아래 평상에 부는 5월의 바람이 어찌나 달달하던지, 그야말로 단잠이 막 쏟아질 것 같았다. 친구 중에 한 명이 홀연히 없어지더니 손에 시원한 맥주 캔을 들고 나타났다. 안주도 필요 없단다. 바로 푸른 녹음이 안주란다. 그 말에 누구 하나 토 다는 사람이 없다.
   기어이 177번 나무까지 확인했다. 죽어가는 나무 하나 없이 정성스레 관리되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곳은 더없이 소중한 공간이다. 오랫동안 보존되어 더 멋진 풍광으로 사람들의 위안을 줄 수 있는 길이 되길 빌며 그 곳을 걸어 나왔다.
   관방제림을 보며 청주의 가로수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청주시민은 물론 타지 사람 치고 가로수길에 반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국에서 알아주는 아름다운 길이다. 차가 씽씽 달려 감히 접근할 수 없거나 차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길은 사람들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관방제림처럼 사람들의 찬찬한 발길과 눈길로 어루만질 수 있는 청주의 가로수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청주의 가로수나무에 번호를 붙이면 몇 번까지 갈까. 1300여 그루가 넘으니 그 숫자를 일일이 헤아리며 가로수길을 걸으면 반나절은 족히 걸리리라. 그래도 좋으니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아름드리 양버즘나무 하나하나의 가슴에 소중한 명찰을 달고 사람들 속에 숨 쉬는 청주의 가로수길을 꿈꾸어 본다. 사람과 길과 가로수가 한 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