뙤약볕이 내리 꽂는 절길을 걷는다. 무엇이든 여물게 하는 팔월 햇볕은 정수리 위에서 따글따글 뛰어논다. 부러 사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길을 나섰다. 절을 갈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일말의 고됨도 없이 경내에 들어서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이마와 콧잔등, 인중에도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호흡을 고르며 가파르게 경사진 절길을 올라 경내로 들어선다.
   사찰 뒤에서 환한 빛이 흘러나온다. 상사화다. 이파리도 없이 연분홍 갑사저고리를 입은 여인네마냥 여린 듯, 수줍은 듯 무리지어 피어 있다.오롯이 꽃대를 밀어 올려 나리꽃처럼 환하게 벌어지는 상사화. 잎이 없기 때문에 연분홍 화려한 꽃빛깔은 더욱 도드라진다.
   상사화는 한참 더운 8~9월에 핀다. 후텁지근한 무더위에 무엇이든 다 녹아내릴 것 같은 가운데 고고하게 피어나는 꽃이다.
   잎은 이른 봄에 비늘줄기에서 20~30cm 길이로 다복하게 모여 난다. 진초록의 비늘잎은 수분을 담뿍 담고 있는 것처럼 탱탱하며 실하다.그런데 생명력이 그토록 무성했던 잎은 꽃이 필 때쯤이면 시나브로 말라 죽는다. 꽃을 더욱 탐스럽게 피어 올리기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이 아닐까.잎과 꽃을 한꺼번에 피워 올리기엔 뿌리에 저장된 영양분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잎이 지고 나면 꽃줄기가 올라와 다섯에서 여덟 개의 꽃이핀다. 잎과 꽃은 한 뿌리에서 나지만 만날 수 없다. 하여 상사화, 또는 이별초라고도 불린다.
   상사병, 어떤 이성을 그리워한 나머지 생기는 병이다. 잎과 꽃이 평생 만나지 못한 채 서로 그리워하는 상사화.
   상사화는 한 스님이 세속의 여인을 사랑하다 상사병에 걸려 죽게 되자 그 무덤에서 피어난 꽃이다. 어쩐지 상사화 연분홍 꽃잎이 예사롭지 않다.손만 대도 녹아내릴 것처럼 연약해 보였으며 바람만 불어도 꽃대는 쉽게 쓰러질 것처럼 낭창낭창 휘어지기까지 했다. 그 위로 가슴앓이 하다가죽은 젊은 스님의 파리한 얼굴이 그려진다.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죽음을 불러오는 독이 되었을까. 연분홍 상사화 앞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사람의 인연도 이와 같은 것이 있다. 평생 그리워하지만 만날 수 없는 인연.
   인연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 모든 그 무엇과 의 만남이 인연이라 했다. 한 세상 살면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인연을 맺으며 살아갈까. 어떤만남은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인연이 되어 오랜 시간 함께 간다. 바람처럼 가벼운 인연이 수없이 스치기도 하고 혹은 결코 가볍지 않은 인연을가볍게 치부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하물며 잎과 뿌리로 맺어진 관계인데 한 번도 만날 수 없는 상사화의 운명은 또 얼마나 얄궂은 인연인가. 비록 만날 수 없지만 자신을 미련없이 버리는 잎사귀의 희생으로 화려한 꽃을 피워 돋보이게 하는 것이 상사화의 운명이며 사랑이다. 한편으로는 소중하고 멋진 인연이다.
   지금 내가 맺은 인연과 앞으로 맺게 될 인연 또한 수십 수만 가지의 형태로 변할 것이다.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연도 마찬가지다.지금 내가 맺고 있는 인연과 앞으로 맺게 될 인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가 나를 사랑해주는 길이며, 인연에 대한 최고의 예의일 것이다.상사화처럼.
(200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