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철이다. 우리 가족에겐 휴가라기보다 여름 여행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바닷가나 계곡보다 이 도시 저 도시로 옮겨가며 그 곳의 문화유적을 둘러보는 것이 여름휴가니 말이다. 매 년 여름휴가를 떠날 때 함께 했던 꽃이 있다. 어딜 봐도 우거진 초록이 지천일 때 그 속에서 부끄러운 양 연분홍 혹은 짙은 자색으로 볼을 붉히고 있는 꽃, 바로 배롱나무이다. 윗녘보다는 아랫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나무이다.
   몇 년 전 남원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남원 어귀에 들어서자 온통 춘향이와 이도령으로 치장한 문구와 캐릭터를 볼 수 있었는데 그것들의 배경은 하나같이 배롱나무였다. 성춘향과 이도령의 그 유명한 로맨스에 걸맞게 배롱나무는 분홍빛 꽃을 오보록하게 피워 그들의 애틋한 사랑을 한층 돋워주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올해도 짬을 내어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차창 밖을 스치는 길가에도 역시 배롱나무 꽃이 눈에 띄었다. 연분홍 꽃다발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을반기는 것처럼 화사하고 밝다.
   배롱나무는 나무백일홍, 혹은 목백일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꽃이 피면 100일을 간다는 이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옛 말에 열흘 붉은 꽃은 없다고 했는데 정말 배롱나무 꽃이 100일 이상 간다면 놀랍지 않은가. 엄밀히 말하면 한 송이가 피어 그렇게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꽃들이 차례대로 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피고지고 또 피는 무궁화처럼 말이다. 거기다 붉은 자색이 돌 정도로 선연한 빛깔이어서 여름철 어디에 있어도 다른 꽃들을 제치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꽃이다
   배롱나무는 수피가 특이하다. 수피가 거의 없는 것처럼 얇은데 줄기에는 흰색의 둥근 얼룩이 있다. 흰색의 둥근 무늬를 손톱으로 살짝 긁어주면 나무 전체가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명 간질나무 또는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수피가 얇아 겉과 속이 같다하여 절집 마당이나 사당, 서원 등에 많이 심었다. 특히 선비들이 좋아하여 가까이 한 나무 중 하나이다.
   배롱나무는 따뜻한 곳을 좋아하기 때문에 중부 이북 지방에서는 잘 자라지 못한다. 요즘엔 온난화로 그 한계선도 넘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배롱나무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 고장에서도 정원수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가 되었으니 말이다.
   꽃모양새는 진분홍 얇은 습자지를 오글오글 주름 잡아 놓은 것처럼 간드러지게 생겼다. 여섯 개의 꽃잎이 길게 뻗어 나와 수술과 암술 주위에 둥그렇게 모여 피는데 꽃잎 가장자리의 주름으로 더욱 화려하게 멋을 냈다. 캉캉춤을 추는 무희들의 치마 주름 같다고 할까. 배롱나무는 어느 것보다 여름 한철을 뜨겁게 보내는 나무이다. 7월부터 9월까지 한 여름 햇볕을 뜨겁게 받아내며 붉게 피워 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름휴가 때 가는 곳마다 만나는 배롱나무를 잊을 수가 없다. 이제 여름 휴가하면 배롱나무가 배경으로 떠오르고 추억의 자리마다 배롱나무 꽃이 붉게 타고 있다. 여름의 추억을 화려하게 색칠해 주는 배롱나무가 새삼 고마운 요즘이다.(200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