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갑하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달려 나갔다. 내가 갑갑할 때 찾는 것대산 봉수대에 올랐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어제 내린 폭우의 기미를 벗지 못한 하늘은 잔뜩 흐려 있다. 온통 회색빛이다. 것대산 봉수대에 서면 늘 반겨주던 바람이 없어서인지 산 아래를 내려다봐도 갑갑한 건 마찬가지였다. 친구의 전화를 받고 같이 것대산에 오르자고 했을 때 어쩌면 내 마음은 친구보다 더 갑갑했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없는 것대산은 아무 맛도 나지 않았으며 습기로 가득 찬 대기는 밍밍하기 그지없었다.
   발길을 돌려 상당산성으로 향했다.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며 산길을 오르는데 흐린 대기 속에서 눈길을 붙드는 색깔이 있었다. 지금 한창 피어나는 꿀풀의 보랏빛이었다. 초록으로 우거진 수풀 속에 액세서리마냥 빛나는 꿀풀. 키를 울쑥 세워 눈에 띄지도 않으며, 큰 꽃잎으로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편도 아니다. 그렇다고 꽃잎을 총총히 달고 소담함을 뽐내지도 않는다. 줄기 끝에 타원형의 방망이처럼 생긴 꽃대에 입술 모양의 꽃부리가 빙 둘러 피는데 그것도 이 빠진 것처럼 들쑥날쑥 나있어 어쩐지 허술해 보이는 꽃이다. 그렇지만 짙은 보랏빛 꽃빛깔만은 선명하여 눈길을 잡는다.
   꿀풀은 꿀이 많이 나서 벌과 나비가 잘 날아든다. 그래서 꿀방망이라고도 불리며 봄에 나는 어린 순은 줄기가 가지색처럼 붉어 가지골나물이라고도 하여 나물로 먹기도 했다. 꽃이 지고 여름이 지나면 방망이 같은 꽃차례가 곧게 선 채로 변색되어 남아있어 하고초(夏枯草) 라고도 불린다.
   그렇게 여기저기 한두 개 피어난 꿀풀을 보며 길을 가다 누가 심어놓기라도 한 것처럼 온통 꿀풀로 뒤덮인 곳을 만나게 되었다. 짙은 초록빛의 무성한 맥문동 잎사귀와 꿀풀의 보랏빛은 환상의 조화로움을 이루었다. 밝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오묘한 빛깔을 빚어냈다. 그 위에 솔가지가 낮게 드리워져 한층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위는 회색빛으로 흐렸다. 그 빛깔을 보는 순간, 지금 내 마음이 저런 빛깔이 아닐까, 생각했다. 침울한 하늘에 어두울 정도로 짙은 초록바탕에 피어있는 짙은 보랏빛 꿀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자연을 찾으면 그 마음을 알아주는 빛깔이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번에 만난 우거진 수풀과 꿀풀의 어우러진 빛깔이 꼭 그랬다.
   아직 오월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았고 앞으로 다가올 여름도 뭐 그다지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기에 짙은 초록빛 속의 보랏빛과 어두운 회색빛의 조화로움이 음울한 마음을 고스란히 되비쳐주고 있었다.
   마음을 알아주는 빛깔을 만난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날이 흐리지 않았다면, 솔가지가 늘어지지 않았다면, 마음이 그렇게 울적하지 않았다면 들어오지 않았을 빛깔이다.
   갑갑한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바람은 만나지 못했지만 울적한 마음을 함께 토로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행복했고 언제든 달려오면 마음을 알아주는 자연이 있어서 더없이 고마운 하루였다. (200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