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언제나 의연하고 고요하다. 순백의 하얀 꽃봉오리를 밀어 올리고 어느 순간 활짝 벌어져 하늘의 기운을 모은다. 먼 데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만지지 못하는 위엄을 가지고 있으며 그 향기는 멀수록 맑다. 그것 앞에 서면 나는 누에씨 만하게 작아지며 겸손해진다. 그 흔들림 없는 고매함에 한없이 존경스럽기도 부끄럽기도 하다.

   올 여름, 어느 해보다 몸은 분주했으나 마음은 둘 곳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 잔잔히 그려지는 백련의 모습은 위로였으며 피난처였다. 유난히 가는 곳마다 백련지가 있어 눈길을 끌었는데 볼 때마다 그 정갈함에 더위도 잊고 어지러운 마음도 잠시잠깐 고요해질 수 있었다.

   7월 한 더위에 보았던 현암방죽의 백련은 생명의 그 팔팔한 기운이 넘쳤다. 그 승한 기운을 지그시 누르듯 흰 꽃봉오리는 누군가의 발원처럼 오롯이 피어있다. 하얀 촛불을 켜놓은 듯 하늘로 향한 꽃봉오리를 보며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물 위에 올쏙볼쏙 솟아있는 널따란 이파리는 나려오는 비도 햇빛도 바람도 다 받아줄 것처럼 품이 넓었다. 그만그만한 키로 올라온 연잎은 방죽의 물 한 조각 내비치지 않을 만큼 푸르게 빼곡했다.
   연잎의 키는 똑 고르지 않다. 어느 것은 낮게 어느 것은 높게 올라와 있다. 서로의 햇빛 바라기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어느 것은 벌써 연밥을 맺었다. 계절이 깊어지면 연밥은 까맣게 익어갈 것이다. 그렇게 속이 들어차면 물속으로 떨어져 천년 후의 다음 생을 기약할 것이다.
   올해는 유난히 백련이 눈에 밟힌다 했더니 가족 여행으로 찾아간 안동 하회마을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백련은 이우는 햇볕을 받으며 뭇 사람들의 시선을 한껏 받고 있었다. 무더위 속에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처럼 한 줄기 정갈함이 그곳에 있었다.
   별러 찾아간 도산서원 안의 도산서당 앞 작은 연못에서도 연을 만날 수 있었다. 연못의 이름은 정우당이다. 정우당은 한 평 남짓한 작은 연못이다. 안내판에 ‘연꽃은 진흙탕에 살면서 몸을 더럽히지 않고, 속은 비고 줄기는 곧아 남을 의지 하지 아니 하며, 향기는 멀수록 맑고, 바라볼 수 있지만 가지고 놀 수 없어 꽃 중의 군자(君者)‘라고 쓰여 있었다. 정우당에는 아직 연꽃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을 표현한 글귀가 꽃이요, 향기였다. 홀린 듯 몇 번이나 그 글귀를 읽었다. 연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정갈한 표현이 있을까.
   올 여름, 일이 많아 마음도 몸도 지쳐 갈 때 위로를 준 건 발 닿는 곳마다 만난 연꽃이었다. 물길 진흙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연을 보며 내가 갖고 있는 크고 작은 시름은 내세울 만한 것도 아니었다. 연꽃의 향기처럼 멀수록 맑게 그렇게 담담하게 살고 싶다.(2008.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