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날씨를 표현하는 우리 말 중에 ‘뜸 들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요즘 날씨가 꼭 그렇다. 뜨거운 햇볕에 습도까지 높으니 숫제 뜸 들이는 가마솥 안에 들어앉아있는 것 같다. 매 년 드는 생각이지만 여름을 어떻게 나야 할지 눈앞이 깜깜하다. 계곡의 푸른 물소리와 숲 그늘이 절로 그리워진다.
   이즈음 숲에 가면 시원한 덩굴로 넌출진 으름덩굴을 볼 수 있다. 지금쯤 갓난아기 조막손만한 초록색 열매가 달려 있겠다. 으름덩굴은 봄에 주보랏빛 꽃이 피고 여름 내내 초록색 이파리를 자랑하며 가을에는 달콤한 열매를 맺는 식물이다. 으름덩굴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깊은 산속에 두기에는 정말 아깝다. 으름덩굴은 담쟁이나 등나무 못지않게 사시사철 관상용으로 손색이 없으며 철마다 보는 재미까지 준다.
   몇 해 전 봄이 무르익을 즈음, 어느 동네 골목길에서 만개한 으름꽃을 우연히 스치게 되었다. 순간 숨이 딱 멎는 줄 알았다. ㄷ 자형의 단아한 한옥 지붕을 타고 으름덩굴이 지붕과 지붕을 잇대어 마당을 뒤덮었다. 얼키설키 얽은 덩굴 아래 주보랏빛 으름꽃이 헤아릴 수 없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흔히 으름덩굴은 주변 나무를 타고 올라 한쪽으로 층을 이루며 자라는데 이제까지 보아온 으름덩굴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것도 산 속이 아닌 여염집에서 으름꽃의 장관을 보다니, 더욱 귀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으름덩굴은 한 나무에 수꽃과 암꽃이 따로 핀다. 암꽃은 수꽃보다 훨씬 크고 주보랏빛이 더 진하며 수꽃은 미색에 가까운 꽃을 피운다. 그 집 마당에 들어서면 헤아릴 수 없는 으름꽃이 머리 위에 별처럼 치렁거릴 텐데, 흔하지 않은 풍경을 일상으로 들여온 그 집 사람들이 몹시 부럽기까지 했다. 산속에서나 볼 수 있는 으름덩굴을 마당에 들여 곱게 키운 집 주인의 안목이 보통은 아닌 것 같았다. 새삼 집주인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분명히 산도 좋아하고 야생화도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남의 집을 몰래 엿보는 것 같아 더 이상 기웃거릴 수 없어서 곧 뒤돌아섰지만 그 집 마당에 자리 깔고 으름꽃을 올려다보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슴에 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으름꽃이 쏟아지는 그 풍경에 세상의 시름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
   가을이 되면 으름 열매는 갈색으로 변하며 반으로 쩍 벌어진다. 그 속에는 씨앗을 잔뜩 품고 있는 하얀 열매살이 들어 있다. 달콤하며 물컹해서 마치 바나나를 먹는 것 같아 일명 한국산 바나나라는 별칭도 있다. 한 입 베어 물면 작고 까만 씨앗이 한 가득 느껴지는데 열매살을 쭉쭉 빨아 먹은 다음 뱉어내면 된다. 그렇게 해야지 으름덩굴의 씨앗 퍼트리기 전략이 제대로 먹혀 들어간 셈이다. 으름덩굴은 달콤한 열매살로 사람이나 짐승을 유혹해 씨앗을 퍼트리는 것이다.
   한여름 무더위가 견딜 수 없을 때 푸른 폭포수 같은 으름덩굴을 생각해봐야겠다. 거기에 몇 개의 으름이 달렸는지 헤아려 보며 더위를 잊어 보는 것도 좋겠다. 계절이 흘러 으름이 익을 때쯤이면 푹푹 삶아대던 무더위도 저만큼 물러가 있을 것이다.(2008.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