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얼마나 섬세하고 또 얼마나 아둔할 정도로 깜깜한 것인가. 어떤 기억은 문장이나 단어로 만나도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이 본능처럼 재생된다. 또 어떤 것은 아무리 설명하고 묘사해 줘도 절대 기억나지 않는 일이라고 시침 뚝 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너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일이었노라고 상기시켜 주어도 깜깜한 동굴 속처럼 기억 속에서 지워진 것도 있고 한편으론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절대 잊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보거나 듣기만 해도 단박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 있다.
   얼마 전 산길을 오르다 고욤나무 여러 그루를 보게 되었다. 산 길 양 옆으로 크고 작은 고욤나무가 도열하듯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새삼 반갑기도 했지만 입안의 침샘이 먼저 반응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고욤, 하면 입안에 단맛이 먼저 고인다. 깊은 항아리 속에 된장 빛깔로 짓이겨진 고욤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그 다음이다. 고욤을 먹어본 지 삼십 년 넘는 세월이 지났다. 삼십 년을 훌쩍 뛰어 넘어 어린 시절 장독대에서 퍼먹던 고욤에 대한 기억이 몸 안에 재생되고 있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 우리집 뒤란 돌담 옆에는 고욤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줄기도 가지도 가늘어서 눈에 띄는 나무는 아니었다. 대문간 옆에 있는 우람한 감나무, 대추나무에 비하면 고욤나무는 나무 축에도 들지 않는다고 여겼다. 감이나 대추는 익으면 따먹기라도 할 수 있지만 고욤은 씨만 잔뜩 들었지 먹잘 게 없었다. 고욤은 추운 겨울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장독 뚜껑을 열면 달게 익은 고욤이 곰삭고 있다. 차디차게 언 고욤을 한 숟갈 떠 입에 넣으면 단맛이 퍼지며 입안엔 딱딱한 씨들이 가득 찬다. 단맛을 쭉쭉 빨아 먹은 뒤 입안에 남은 것을 뱉어내면 고욤 씨가 오보록하게 쌓였다. 딱히 먹을 것도 놀 것도 없던 어린 시절, 긴긴 겨울밤 입은 점점 구진하고 무구덩이에서 비릿한 무라도 깎아 먹을라치면, 번뜩 떠오른 고욤은 최고급 간식이었다.
   그게 벌써 삼십여 년 전 일이다. 그 후 고욤을 먹어보지도 고욤나무를 본 지도 감감하다. 그래서 그런지 고욤나무를 보면 어렸을 때 살았던 초가집이 떠오르고 초가집 닮은 허름한 돌담이 떠오르고 기우는 돌담 옆에 나무 같지 않은 나무로 서 있던 고욤나무를 떠올리게 된다. 고욤나무는 잊을 수 없는 고향이며 내 뼈와 살을 여물게 했던 어렸을 적 양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럴까. 고욤나무를 보자마자 입 안에 단맛이 고여 오는 건 피 속에 각인된 기억 때문일 것이다. 뼈와 살이 무를 때 보고 느끼고 배운 것이 얼마나 큰 힘으로 작용하는지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이다.
   작고 앙증맞은 고욤꽃이 피고 그 꽃이 지고 나면 은행알 만한 고욤이 열릴 것이다. 초록색이었던 고욤은 희끗희끗 분을 바르며 노랗게 익어갈 것이다. 나무로도 열매로도 보잘 것 없지만 면면히 이어온 우리의 고유한 맛이었다. 과실이 먹잘 게 없다하여 고욤나무가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왠지 사라져서는 안 될 소중한 고향의 모습이 고욤나무 속에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