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거리 시장 좌판을 지나다 오디를 보았다. 은빛 스텐그릇 위에 까만 오디가 고봉으로 올라와 있다. 초여름 햇빛을 받은 오디에서 반들반들 윤이 났다. 오디가 당뇨에 그렇게 좋다는데. 당뇨가 있는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다. 지척에 계시지만 바로 갈 수가 없어서 오디 사는 것을 뒤로 미루었다. 그러다가 오디에 대한 이러저러한 일들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 우리집은 누에를 쳤다. 당시 집집마다 누에를 치지 않은 집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이른 봄이 되면 까만 누에씨를 작은 상자에서 부화시켰다. 까만색에서 하루하루 색을 달리하는 누에씨를 어머니는 매일매일 정성스럽게 보살폈다. 보석이라도 보듬듯 아침 저녁으로 누에씨의 색깔을 살폈다.

어느 날 상자 안에는 꼬물꼬물 개미 같은 누에가 움직였다. 그 때부터 안방은 누에 차지이다. 아랫목에 자리를 깔아 키우다 누에가 점점 커지면 싸리나무 침대를 만들어 층층이 누에를 쳤다. 이때쯤 뽕나무도 어린잎을 내밀어 누에 키울 준비를 한다. 어린 뽕잎을 곱게 채 썰어 어린누에에 뿌려주던 어머니의 정갈한 손길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연초록 뽕잎을 한 치도 다르지 않게 곱게 채 썰던 그 맑은 손끝.

첫 잠을 자고 난 누에가 허물을 벗고 1령이 되고 두 잠을 자고 2령 세 잠을 자고 3령, 4령 5령. 이렇게 자란 누에한테는 넓은 뽕잎을 그냥 주는데 먹는 양이 대단했다. 잔뜩 오므려서 삐죽 나온 것 같은 입이 오물오물 움직이면 어느 새 뽕잎은 간 곳 없이 사라졌다.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을 때 소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내리는 빗소리 같기도 하고 멀리서 모래사장을 쓰는 파도소리 같기도 했다. 겨우내 안방을 차지했던 우리들은 누에한테 자리를 내주고 이제 모두 윗방에서 자게 되었다. 그 때는 누에가 무척 미웠다. 비좁은 윗방에서 언니들과 어깨를 맞대고 자기가 무척 불편했다. 더위가 슬슬 몰려 올 때는 갑갑해서 한밤에 잠이 깨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귓가에는 사각사각 무수한 누에들이 뽕잎을 갉아 먹는 소리가 들렸다. 시원한 빗소리 같았다.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해준 소리이기도 했다.

햇볕이 뜨겁게 익어가는 초여름이면 뽕잎은 제법 억세어지고 뽕나무 가지에는 오디가 붉게 익어간다. 처음엔 초록색 애벌레처럼 작고 보잘 것 없다가 햇볕을 받아 농익은 오디는 검보랏빛으로 변해 제법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뽕밭에서 뽕잎하나 따고 오디 한 개 따먹고 그렇게 바구니 가득 뽕잎을 따가지고 나오면 입술은 보라색 잉크를 칠한 것처럼 검붉다. 혓바닥에는 오디의 오돌토돌한 성근 감이 남아있고 입안에는 들큼한 맛이 가득했다.

집 뒤란에는 오래된 뽕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는데 키만 삐쭉 자라 뽕잎 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손닿지 않은 곳에 있는 오디만큼 감질 나는 게 또 있을까. 늘어진 나뭇가지를 잡아 당겨 뽕잎은 어찌어찌 땄지만 가지 깊숙한 곳에 붙어 있는 오디는 눈으로 먹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노는 시골아이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 더군다나 먹는 것 앞에서는. 나는 신발을 벗고 뽕나무 위로 기어올랐다. 중간 중간 부러진 가지를 밟고 올라가 눈요기로 그쳤을 맛난 오디를 입에 따 넣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한 처녀 오디가 입안에서 톡 터지는 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을 안겨 주었다. 언니들은 나무 아래서 부러운 듯 올려다보고 나는 여 보란 듯이 더욱 맛나게 오디를 먹었다. 오디를 배불리 먹고 내려갈 때이다. 뽕나무는 여느 나무보다 좀 미끄러운 편이다. 거기다 오래된 뽕나무는 주가지가 반들반들할 정도로 매끈하다. 발을 디디고 내려오다 그만 쭉 미끄러져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뱃가죽이 몹시 쓰리다는 희미한 느낌만 있을 뿐 그 뒤로는 아무 기억도 없다. 식은 바람이 이마를 스쳐 눈을 떴을 때는 마루 위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있었다. 배에서는 아릿한 통증이 몰려오고 어머니는 ‘오디 먹다 죽을뻔한 아이’라고 놀려 댔다. 언니들도 고시다는 듯 놀렸다. 그 뒤 뽕나무에는 두 번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누에가 어른 새끼손가락 굵기만 하게 자라면 어머니는 지푸라기로 만든 섶을 누에 위에 올려놓는다. 누에는 지푸라기를 잡고 하얀 명주실을 토해 내며 고치를 짓는다. 며칠 되지 않아 누에는 하얗게 고치를 틀고 어머니는 바구니 가득 고치를 담아낸다. 어머니는 광주리 가득 누에고치를 이고 장으로 나가신다. 어머니 머리에 하얀 누에고치가 둥둥 떠가고 나무들은 초록으로 반짝거리던 여름이었다. 돌아보면 예쁜 그림 같은 어렸을 때 일이 한 장 한 장 기억의 갈피를 넘어간다. 어머니에게는 누에치던 일이 가물가물한 옛일이 되었고 누에에 관한 것은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게 되었다. 육거리 시장 좌판에 놓여 있는 한 그릇의 오디는 그렇게 삼십여 년 전의 추억을 불러왔다.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다. 멀미나도록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던 고향의 그 신작로를 걷고 싶다. 광주리 가득 하얀 고치를 이고 장으로 가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아지랑이 속에 그려 넣을 수 있으려나. (2007.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