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월 도심의 가로수만큼 황량한 게 또 있을까? 봄바람이 불어오고 달콤한 봄비가 내려도 꿋꿋이 겨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건 가로수뿐인 것 같다. 아우성치듯 하늘을 향했던 잔 나뭇가지들조차 지난 가을 언제쯤에 전기톱에 잘려나가고 뻣뻣한 가지들만 몇 개 내 뻗고 있다. 만산이 옷을 갈아입는 요즘, 길가의 가로수는 흉물스러울 정도이다.

  야산엔 진달래가 연분홍 꽃봉오리를 터트리고 무심천변의 개나리, 벚꽃 벙시레 꽃망울을 터트려도 플라타너스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발치 아래 노랗게 핀 민들레가 봄볕과 놀아나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무심하고 무뚝뚝하게 봄을 맞이하고 또 보내고 있다.

  길을 가다, 몸뚱이만 서 있는 플라타너스를 보며 가만히 생각해 본다. ‘플라타너스가 이렇게 늦게 잎눈이 틔던가?’ 처음 이런 사실을 알아낸 것처럼 새삼스럽게 질문을 던져보며 다시 한 번 바라본다. 겉보기엔 장작개비 같아도 분명 저 몸속엔 지금 봄물이 내뻗치며 차오를 것 같은데, 어쩜 저렇게 아무 표정 없이 이봄을 견딜까, 하는 생각까지 미친다. 아무래도 플라타너스는 초여름이 돼야만 잔가지를 뻗고 잎을 틔울 것 같다. 그들에게 이 봄이 얼마나 지루할까.

  그러다가 그들에게서 묵묵한 기다림을 읽었다. 아, 기다려주는 거구나. 플라타너스보다 키 작은 모든 것들이 활개 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플라타너스의 잎이 좀 넓은가? 활엽수 중에서도 특히 잎이 넓어 햇볕 쨍쨍한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다복한 이파리 속에 참새들도 신나게 짹째글거리며 놀게 해주고, 운동장 가에 서서 운동회 연습하는 햇솜 같은 아이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는 넉넉한 품을 가진 플라타너스 아니던가. 그의 품이 이토록 넉넉하기에 이른 봄 잎이 패면 햇볕을 모두 가려 플라타너스 아래엔 아무 것도 살 수 없다. 키 작은 민들레도, 가느다란 꽃마리도, 청보랏빛 개불알풀도 살지 못할 것이다.

  플라타너스는 기다려주는 것이다. 저보다 키 작은 모든 것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 하늘을 향해 몸뚱이를 드러낸 플라타너스 길을 달리며 오늘 따라 그의 묵묵함이 애잔하고 대견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렇듯 아무 생각 없이 무심하게 스치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는 계절은 아무래도 봄이다.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산책을 나갔다가 바라본 목련꽃도 늘 보던 것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은 암자 아래 목련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하얀 풍선이 조금씩 불어나듯 봄볕을 받은 목련꽃들이 공중에 둥둥 떠 숭얼숭얼 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수령이 꽤 된 것인지 어디 한 군데 빈곳 없이 꽃이 다보록하게 매달려 있었다. 훤칠한 키에 하얀 꽃 송아리를 달고 있는 목련나무는 어디서 보나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봄에 나만한 꽃이 있냐고 뽐내는 것 같기도 하고, 흰색 외엔 어떠한 것도 걸치지 않겠다는 오만함도 엿보이는 듯 했다. 목련나무 아래로 향한 작은 오솔길을 발견하고 그 길로 들어서 보았다. 나무둥치에 가까이 서서 꽃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거기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하얀 꽃잎을 정성스레 모아 쥐고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수십 개의 촛불을 보는 듯 했다. 목련꽃은 공손하게 하늘을 우러르며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는 것 같았다. 겸손함과 공손함, 간절함의 모습을 굳이 표현한다면 목련나무 아래서 올려다 본 목련꽃이 아닐까. 멀리서 목련꽃을 바라보며 잘난 체 하는 것 같다느니, 이 봄에 목련꽃만큼 튀는 게 또 있겠느냐, 하는 생각은 금세 달아나 버렸다. 아니 섣불리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웠다. 목련꽃 사이사이로 조각난 하늘을 바라보며 공손함이 내게도 물들기를 빌어 보았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는 지혜로움과 겸손함을 갖추게 해달라고 빌어 보았다. 이 봄, 묵묵한 기다림의 모습과 숭고할 정도의 공손함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 플라타너스와 목련나무는 내게 큰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