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도 지났다. 겨울답지 않은 겨울이었지만 그래도 새 계절이 저만치 오고 있다. 이맘때쯤 산에 오르면 양지 바른 언덕은 질척하고 겨우내 해가 들지 않는 곳은 여전히 흰눈이 쌓여 있다. 그곳을 지날 때면 아직 겨울이라는 것을 되새김질 하곤 한다.

   그렇게 겨울 끝자락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백담사로 향했다. 미시령고개에 부는 세찬 바람은 아직 겨울이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매서운 바람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강원도에 도착하자 맑은 청색 바닷물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손짓했다. 가슴 속에 켜켜이 앉았던 먼지가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두 팔을 벌리며 달려오는 파도를 향해 가슴 속의 앙금을 내주었다.

   그늘진 곳에 얼음이 얼어 백담사까지 가는 셔틀버스가 운행되지 않았다. 왕복 4시간이라고 빨간 글씨로 써 있는데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렇다고 뒤돌아설 수는 없는 길. 걸음을 재촉하여 백담사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자동차 한 대 다닐 정도의 제법 잘 닦인 도로가 펼쳐져 있는데 산 맞은편은 낭하였다. 하얀 얼음 아래에서 제법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이 모퉁이 돌아가면 보이려나, 저 모퉁이 돌아가면 보이려나. 백담사는 한참을 걸어도 통 보이지 않았다. 절을 찾아가는 그 길이 수행이며 고행인 것 같았다. 느린 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노인을 보며 저렇게 힘겹게 이곳을 찾게 한 그 어떤 간절함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 하나만 대도 픽 쓰러질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였다. 곧 해는 떨어질 것 같은데. 전에 연세 높은 할머니가 손톱이 다 닳도록 바위산을 기어오르고 산봉우리를 넘어 작은 암자를 찾아가는 것을 tv를 통해 본 적이 있다. 길도 없는 암자를 찾아가는 그 할머니의 모진 여정이 부처였고 비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발로 산을 기어오르는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말 못할 간절한 염원을 읽을 수 있었다. 삶은 때로는 사람에게 너무 모진 것을 요구한다. 할머니는 암자에 도착한 후 한결 가붓해진 표정으로 두 손을 정갈하게 모은 후 탑을 돌았다. 험한 길을 한 시도 쉬지 않고 바지런히 움직여 암자에 도착하는 것이 할머니의 수행방법인 듯 했다.

   백담사 가는 길은 그 할머니가 갔던 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절에 들어서기 전에 어지러운 마음도 가라앉히고 정갈하게 정돈하려면 이만한 시간을 두고 걷는 것도 좋겠다.

   눈 쌓인 곳을 가만히 살피다가 발자국 몇 개를 발견하게 되었다. 멧토끼, 고라니, 산양 등 인적이 드문 야산에서 볼 수 있는 야생 동물의 흔적이었다. 동물들의 걸음걸이와 발자국 모양을 따라 그들이 머물렀을 겨울 눈 쌓인 어느 산자락을 떠올리다 문득 이들은 추운 겨울을 어디서 어떻게 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먹이를 구하고 매서운 눈보라를 피했을까. 적어도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은 눈 쌓인 겨울산을 헤매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겨울잠을 자지 않는 야생동물들의 생존이다. 햇볕이 아늑한 바위 사이나 낙엽더미 아래 몸을 의지했을까. 먹이를 구하지 못하면 또 얼마나 많은 굶주림의 나날을 보냈을까.

   물가도 마찬가지였다. 꽝꽝 얼었던 계곡물이 풀리자 물가 주변 눈 위에는 어김없이 동물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물가로 목을 축이러 내려왔을 그들의 모습이 발자국 따라 눈앞에 선했다. 그들의 고달픔이 떠올라 가슴 한켠이 싸했다.

   저만치 백담사 마당이 보인다. 널따란 계곡 옆에 기우는 저녁 햇살을 받으며 낮은 지붕으로 펼쳐져 있다. 산속 깊은 곳에 들어 앉아 있어 사찰이 아담하고 아늑할 줄 알았는데 계곡 옆에 꽤 넓은 분지를 차지하고 있고 새로 지은 요사채가 번듯하게 있어 산골짜기 사찰다운 면모는 없었다. 요사채 처마 밑으로 눈 녹은 물이 수정처럼 방울지어 떨어지고 서쪽 산봉우리에 걸린 햇살은 미지근한 온기를 백담사 마당에 부려 놓고 있었다. 고요한 절 마당에 극락보전 처마 밑에서 울리는 풍경소리만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곧 해가 떨어지겠다.

   다시 발길을 재촉해 절을 나서 길을 되돌아 나왔다. 아까 보았던 그 노인은 여전히 힘겨운 발걸음으로 백담사를 향하고 있다. 한발 한발, 발걸음에 기도를 담으며.

   발걸음을 재촉하여 내려오는 길, 계곡물은 얼음장 밑으로 힘차게 내려가고 있었다. 강원도 깊은 산골 계곡 사이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처럼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의 삶이 조금은 부드러워지기를 발걸음 걸음 빌어 본다.

* 백담사는 내설악에 있는 대표적인 절로 가야동 계곡과 구곡담을 흘러온 맑은 물이 합쳐지는 백담계곡 위에 있어 내설악을 오르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세웠는데 처음은 한계사라 불렸으나 그 후,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가 백 개 있어 백담사라 이름 붙였다. 십 여 차례 소실되었다가 6. 25동란 이후 1957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는 등 역사적 곡절이 많은 절이다. 자장율사의 유물소동일좌와 인조 때 설정대사에게 하양한 칠층소형옥탑 등이 있으며, 암자로는 영시암, 오세암, 봉정암이 있다. 그 밖에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머리를 깎고 수도한 곳으로 유명하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前)대통령 내외가 대(對) 국민사과성명 발표 후 이 절에 은거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