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향 땅에 왔다. 매년 아버지 산소에 술 한 잔 드리러 오지만 고향마을 안쪽까지 온 건 한참만이다. 아버지 산소는 고향 마을 초입에 있기 때문에 부러 들어가기 전에는 마을 안쪽으로 갈 일이 없다.

   아버지가 병이 나기 전, 사는 것이 그만했을 때 지었던 집은 그대로 남아 타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집을 팔아넘기고 이사 가서 살았던 초가집은 지금 흔적도 없다. 집자리는 밭으로 변해 있었다. 그 집에서 도시로 이사 오기 전까지 살았다. 없었지만 마음은 편안했던 집이었다. 밭이랑이 나 있는 집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 유년의 추억을 쇠스랑이로 박박 긁어 놓은 것 같다. 아프다.

   고향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어렸을 적 멱 감던 방죽으로 향했다. 논마지기 가운데 있던 방죽, 물놀이 할 곳이 마땅치 않던 아이들이 비료포대에 바람을 넣어 놀던 곳이다. 아이들이 첨벙거리기 시작하면 방죽은 순식간에 시커먼 흙탕물이 되었다. 그래도 좋다고 꼴깍꼴깍 그 물을 먹어 가며 놀았던 곳이다. 난 비료포대가 없다는 핑계로 그 물에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 우선 바닥이 보이지 않아 깊이가 가늠되지 않아 두려웠으며 아이들이 휘정거릴 때마다 일어나는 흙탕물이 두렵기까지 했다. 지하에서 솟아난 물이기 때문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의 입술은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아이들은 추워서 이를 떡떡 부딪치면서도 물에서 나올 줄 몰랐다.

   버드나무 몇 그루 걸치고 논 들판 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강산도 사람처럼 늙어간다. 그렇게 꼿꼿했던 산자락도 어렸을 때보다 축 쳐져 낮아보였고 누룩뱀처럼 구부러졌던 논두렁도 예전의 기운이 아니었다. 이 근방인데, 방죽은 어디에도 없다. 메웠을까? 다시 아프다.

   주변의 논밭에 생명줄 같은 물줄기를 대주던 곳, 어린 시절 입술 시린 추억이 있던 곳, 아무도 모르게 많은 생명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던 곳. 그곳을 찾을 수가 없다.

   얼마 전, 청주 근방 방죽의 생태를 조사한 적이 있다. 방죽 이름만 들어도 그 마을의 사연이 주저리주저리 나올 것처럼 재미있다. 동막골, 꼬꿀렝이, 느더리, 금말량, 돌팍재---. 논 들판 한 가운데에 펼쳐진 동막골방죽엔 노랑어리연이 피어있다. 수면 위에 손바닥만한 초록 잎사귀를 펼쳐놓고 그 위에 살짝 노란 얼굴을 내밀었다. 작고 앙증맞다. 가까이 다가가자 노란빛이 더욱 환해지는 것 같다. 사람을 반기는 걸까? 무서워하는 걸까?

   다섯 갈래의 꽃잎 가장자리는 미세하게 갈라져 잔털이 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름대로 멋을 한껏 부렸다. 잎은 동그란 모양에 여유를 주고 싶었나? 화살촉 같은 트임이 있고 반들반들 윤까지 난다. 뿌리는 물 밑의 진흙 속에 내리고 고개를 최대한 길게 뽑아 세상의 어느 한 풍경을 예쁘게 수놓고 있다.

   고향의 방죽도 노랑어리연꽃을 품고 있었겠지. 보기만 해도 배부른 방죽 식구들을 거느리며 조용히 의연히 논 들판을 지키고 있었을 텐데. 어디로 간 것일까?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은 동막골방죽, 아무도 찾지 않는 것 같았지만 가장자리 풀숲에는 곤충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고 저 멀리 새들이 물 마시러 내려오기도 했다. 방죽 물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꿈틀대고 있을까. 물자라 등에는 알들이 여물어 가고 여름 내 뿌린 잠자리 알들이 익어가고 있을 텐데.

   뭇사람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방죽일지도 모른다. 조금만 시간을 갖고 바라보면 그 방죽으로 인해 무수한 생명들이 이웃하여 살아가고 있으며 그곳의 물로 입때껏 우리 입에 밥을 넣을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어릴 적 추억 한 자락 선물해 주었던 장질께방죽은 사라졌을까? 그곳에 다시 가봐야겠다. 노랑어리연이 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