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딸아이의 생일이었다. 생일 며칠 전, 선물로 무얼 받고 싶냐고 물었다. 선물해줄 것도 아니면서 말 인심이나 쓰자고 물어본 말이었는데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바다를 받고 싶다는 것이다. 무심결에 흘려듣다가 바다라는 말에 놀라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메이커 가방도, 옷도, 신발도, 고성능 휴대폰도 아닌 바다란다. 정말? 나는 단숨에 물었다. 어, 바다 보고 싶어. 아이도 절대 후회 없다는 듯 대답했다. 내심 기뻤다. 드디어 아이 스스로 자연과 대화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의도는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바다를 보고 싶어 하는 제 마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아직 파악을 못했을 수도 있다. 엄마 입장에서 과하게 해석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슴 속에서 흐뭇한 기쁨이 몽실몽실 피어났다.
어쨌든 딸아이에게 기꺼이 기쁘게 선물해 줄 수 있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3월 첫 일요일, 마침 딸아이의 생일이기도 해서 그 날로 여행날짜를 잡고 꼼꼼히 준비해 우리 가족은 바다로 향했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닿은 곳은 통영이다.
   통영은 해안선을 따라 시가지가 발달해 있어 바다가 강처럼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배가 어미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고요히 정박해 있고 그 위에 갈매기가 쉴 새 없이 넘나들었다. 마치 갈매기는 사람들 곁을 차마 떠나지 못해 기웃대는 것처럼 절대 해안가를 떠나지 않았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남망산공원에 올랐다. 언젠가 갑갑한 마음이 있어 바다를 찾은 일이 기억난다. 먼 길을 달려 바닷가에 다다랐을 때 가슴이 탁 트이리라는 기대감을 무너트린 것이 있었다. 그것은 가슴팍을 넘어 미간 위까지 차올라 나를 짓눌러 버린 수평선이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시선 끝에 걸리는 수평선 때문에 바다에 와도 갑갑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 마음이 갑갑할 때 바다를 찾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 갑갑함을 날려준 것이 바로 남망산공원에서 바라본 바다였다. 다도해라 군데군데 작은 섬들이 바둑돌처럼 놓여 있었지만 그것들 때문에 더욱 가슴이 트이는 것 같았다. 청마(유치환)문학관에 들러, 그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통영 사람들은 시를 쓰지 않고는 바다를, 파도를, 붉게 핀 동백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눈만 뜨면 바다와 바람과 갈매기가 저렇게 말을 걸어 올 텐데. 어찌 노래하지 않을 수 있으랴.

   통영 시내 어디를 가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동백이다. 마침 동백꽃이 피는 시기여서 푸른 이파리 위에 붉게 떨고 있기도 했고, 송이 채 떨어져 제 발치를 수놓기도 했다. 떨어진 꽃을 주워들었다. 노란 수술에 새빨간 꽃잎, 꽃잎 한 귀퉁이 상하지도 않았는데 툭 져 버리고 말았다. 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그렇게 툭 떨구는가. 사철 푸른 이파리 위에 붉은 피 같은 정열을 사른 후 한 잎 한 잎 지는 것조차 허락지 않는 기개 높은 여인네를 보는 듯했다. 눈보라에도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에도 초록색으로 지조를 지키다가 추위로 만산(滿山)이 숨죽이고 있을 때 붉은빛을 사르니. 그런데 무엇이 서러워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에 그렇게 탐방탐방 붉은 눈물방울을 떨구는가.
   떨어진 동백꽃을 귀에 꽂았다.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처럼. 사진을 찍겠다고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고만 꽃을 빼고 나무 뒤로 숨고 말았다. 순간 서글픔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젊은 날 한 때 동백꽃잎처럼 붉었던 정열은 온데간데없고 살면 살수록 겁만 남아 꽃도 피지 않을 고목이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설핏 일었다. 몸은 그러할진대, 동백꽃을 귀에 꽂아 무엇하랴.
   동백나무 숲 속이 한 순간 수런거린다. 몇 마리의 새들이 수다스럽게 재재글 거리며 동백나무 숲으로 숨어들었다. 동박새이다. 동백나무는 조매화이다. 새가 꽃가루받이하는 꽃을 조매화라고 한다. 벌과 나비가 활동하지 않는 겨울이나 이른 봄에 피기 때문에 동백꽃은 새들에게 꿀을 주고 새들은 수분을 해주는 것이다.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를 먹는 것도 동박새이다. 동백꽃과 동박새는 각자 하는 일이 자신을 위하기도, 남을 위하기도 하다는 것을 알까? 사람도 이러한 마음을 가진다면 서로 상처 주는 일도 상처 받는 일도 없을 텐데.
   동백꽃과 동박새에 얽힌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나라에 포악한 왕이 살았다. 이 왕에게는 자식이 없어 자신이 죽으면 동생의 두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동생의 두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를 눈치 챈 동생은 두 아들을 멀리 보내고 대신 두 소년을 데려다 놓았다. 이를 알고 왕은 도망가는 두 아들을 데려다 왕자가 아니라고 동생 보고 직접 죽이라고 하였다. 이에 동생은 두 아들을 죽일 수 없어 그 자리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자결을 했고 두 아들은 새로 변하여 날아갔다. 동생이 죽은 자리에서 동백나무가 크게 자랐다. 그 후 두 마리 새가 내려와 둥지를 틀고 살기 시작했는데 이 새가 바로 동박새이다.
   동백나무 씨앗은 두 겹 세 겹 단단하게 무장을 했다. 벌어진 씨앗 껍질은 두툼하면서도 세 갈래로 벌어져 그 모양새가 옷깃에 다는 액세서리처럼 예쁘다. 그 안에 씨앗을 또 한번 단단하게 감싼다. 씨앗은 동백기름으로도 유명하다. 동백기름은 변하지도 굳지도 날아가지도 않아서 그 쓰임새가 요긴하다. 먹기도 하고 날아가지 않아 정밀한 기계에 칠하기도 하고 옛날에 호롱불을 켜는 데도 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옛 여인네들의 머릿기름으로 쓰인 것이 으뜸일 것이다. 신기하게도 머리에 바르면 모양새가 단정하고 냄새나지 않고 마르지도 않으며 때도 끼지 않는다고 한다.
   주로 남도 지방에 많이 자라는데 고기를 잡으러 가는 배에 풍어제를 올릴 때 마을의 처녀들은 물동이에 동백꽃을 띄워 안전하게 돌아오라고 기원하기도 했다.
   바다 저 멀리 기적소리가 울린다. 섬으로 떠날 배가 오고 있다. 갈매기들이 맴을 돌 듯 바닷가를 서성거리고 있다. 바다가 보고 싶다던 딸아이도 바람이 불어오는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섬으로 들어가는 카페리호 갑판 위에서 섬마다 굴 껍데기 같은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마을을 보았다. 바다 위에선 사람도 한 개의 점이었다. 파도에 쉽게 휩쓸려 버릴 것 같은 연약한 존재일 따름이다.
   사람이 그리워 바닷가를 차마 떠나지 못하는 갈매기처럼 나도 사람이 그리워 사람의 숲을 떠나지 못하는 한 마리 갈매기였다.
저기 동백꽃이 진다.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