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무레한 겨울 날씨가 이어졌다. 얼음이 풀리는 이른 봄처럼 바람은 부드러웠다. 그래서 이번 바닷가 여행이 더 설레었는지도 모른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빛깔은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저렇게 오래도록 바라보면 닮을 수 있는 것인가. 내게도 평생을 바라보며 닮고 싶은 것이 있던가.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게 던진 또 하나의 물음이었다.
   만조가 되어 바닷물이 찰랑찰랑 들어찬 간월암를 바라본다. 물에 갇혀 아무도 오가지도 못하는 고립무원의 간월암. 그간 여러 번 와 봤지만 이렇게 만조가 된 건 처음 본다. 물이 빠졌을 때 앙상하게 드러나던 모습보다, 만조의 간월암은 가득 채워진 듯 안정되어 보였다.
   의지가 약해 스스로 가두지는 못하고 물리적인 어떤 것에 갇히고 싶을 때, 나는 많은 눈과 많은 비를 상상한다. 그러나 간월암은 눈도 비도 필요 없이 사람을, 시간을 가둘 수 있는 곳이다. 먼발치서 간월암를 바라보며 오늘은 들어가지 못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자그마한 줄배에 사람들이 가득 타고 만조의 간월도를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할 것 같은 안타까운 마음은 단 몇 초 만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래, 우린 사람이지. 사람임을 항상 내세워야 하지. 그렇게 체념했다.
   줄배를 타고 간월암 마당에 들어섰다. 마당 가운데 한 겨울에 꽃단장한 나무를 보게 되었다. 간월암을 품어 안을 듯 널따랗게 퍼져있는 사철나무였다. 사철 푸른 이파리를 달고 있어서 사철나무인데 간월암의 사철나무는 결코 푸르지 않았다. 푸른 잎사귀 위에 수십 개의 자그마한 방울을 오종종 달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사철나무가 아닐 것이라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이렇게 어느 한 곳 허술한 데 없이 일부러 치장을 한 것처럼 방울을 달고 있을까. 방울은 다름 아닌 씨앗 껍질이었다.
   사철나무는 여름에 꽃을 피운다. 자잘한 풀색으로 피는데 언뜻 봐서는 꽃인지 무언지 모를 정도로 작고 틔지 않는 색깔을 하고 있다. 사철나무나 회양목 등 상록나무의 꽃을 보면 꽃이 피지 않는 나무는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수수하다. 흰색에 노랑과 녹색을 조금 섞어 놓은 듯, 여느 꽃빛깔과는 다르게 눈에 띄지 않게 핀다.
   사철나무는 꽃이 지고 나면 둥글기도 하고 모나기도 한 열매가 달린다. 열매가 익으면 맑고 밝은 주홍빛 씨앗이 반들반들 윤을 내며 터져 나온다. 열매가 오히려 꽃빛깔처럼 눈에 확 들어온다. 진초록 잎사귀 위에 윤기가 도는 밝은 주홍빛이 조각조각 매달려 있다고 생각해 보라. 꽃 색도 수더분하고 단풍도 들지 않아 사철 푸르기만 할 것 같은 사철나무는 열매로 그 감춰진 열정을 내뿜는 것 같다.
   간월암에서 본 사철나무에는 씨앗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군가 씨앗을 쏙 빼가고 껍질만 남겨 놓은 거처럼 그렇게 벌어진 채 달려 있었다. 껍질이 벌어져 저절로 씨앗이 바닥으로 떨어졌을까. 아니면 새들이 조심스레 먹다가 간 것일까. 간월암의 사철나무는 씨앗을 다 줘버리고도 아름다운 꽃단장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빈 껍질만 달고 있는데도 그 자태가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소나무도 봄이 되면 송화가루로 화장을 하듯 사철나무도 겨울에 열매로 고운 액세서리를 단다.
   간월암을 뒤로 하고 나오는 머릿속엔 사철 푸르다는 것을 깨버린 사철나무의 고운 자태가 남아 있다.
   어찌 평생을 한 가지 색깔로 살 수 있을까. 때론 단풍도 들고 열매로 치장하며 그 지루함을 달래겠지. 그래도 본디 한 색깔로 지조를 지키는 근원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열매로 붉게 장식을 했다고 해서 사철나무가 사철 푸르지 않은 건 아니지 않은가.
   사람도 평생 한 가지 색으로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한 가지 색을 고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의 번뇌를 감히 사철나무 열매에 대입해 보며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로 향했다.
   밤바다에 서면 왜 울고 싶은 것일까. 한 가지 색이어서? 혹은 여러 가지 색이어서? 모르겠다. 그냥 울자. 아무도 우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아무도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