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여름, 아무 의욕도 나지 않는 여름 한낮이다. 매미는 쩌렁쩌렁 울어대고 뒷덜미는 후끈하게 달아오른다. 바람은 한소끔도 불지 않는다. 찬물 쏟아지는 계곡 옆, 나무 사이에 자리를 깔고 몸을 식히고 싶다. 그래야 정신이 맑아지겠다. 사람이란 얼마나 허약하고 예민한 존재인가. 평균치보다 기온이 조금만 올라가도 몸과 정신이 허물어져 내릴 것 같으니.
   한 여름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피는 꽃이 있다. 그들은 한껏 태양의 뜨거움을 즐기는 듯하다. 여름이면 어느 집 담장 너머나 공원 한 쪽에 홍등을 켜고 불 밝히는 꽃, 요염한 자태로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꽃, 바로 능소화이다.
   능소화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예쁘다기보다는 불온하다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독 때문이었을 것이다. 능소화의 꽃가루는 눈을 멀게 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래서 화사한 아름다움 뒤에 도발적이고 대담하고 뇌쇄적인 것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푹 빠져들도록 유혹한 후 눈을 멀게 하는 요부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능소화의 매력을 떨쳐버리는 못했다. 눈이 멀어도 좋다. 누구나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유혹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불볕더위 속에 피는 꽃이라서 그럴까. 모든 사물이 더위에 지쳐 시들할 때 능소화는 활 피어 뭇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주먹만한 꽃송이가 초록 바탕 위에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은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탐스럽기도 하고 시원스럽기도 하다.
   여름이면 친정집 뒷마당 담장에는 능소화가 질펀했다. 우리집에서 피워 올린 것이 아니라 이웃집에서 자란 것이다. 몸은 담장 안에 있지만 고개는 잔뜩 울타리 너머로 내밀고 밖을 향한 그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넌출진 줄기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해가 저물도록 놀면서도 탐스러운 그 꽃을 함부로 만지지 못했다. 이유는 우리집 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만지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눈이 먼다고 했다. 뿌리나 줄기의 형체는 담장에 가려 볼 수 없기 때문에 저 꽃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두려움이 그 꽃에 대한 어릴 적 감정이었다.
   능소화는 덩굴성 목본 식물로 중국이 고향이다. 튼실한 줄기가 꼬이며 자라다가 줄기마디에서 생기는 흡반이라는 뿌리로 건물이나 다른 나무에 붙어 타고 오른다. 꽃은 나팔모양으로 원뿔 형태이다. 주홍빛 작은 나팔이 수십 개 줄기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다섯 갈래로 벌어진 꽃잎 가장 자리는 주홍빛이고 안 쪽 수술이 있는 부위는 진노랑에 핏줄 같은 실금이 그려져 있다. 수술은 끝이 구부러져 있는데 수술 끝에 달리는 꽃가루는 갈고리 모양이기 때문에 눈에 들어가면 좋지 않다. 그래서 능소화의 꽃가루는 눈을 멀게 한다는 속설이 있었던 것이다. 꽃이나 잎에 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는 이 꽃을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다하여 양반꽃이라고도 불렸다. 한자로 능가할능(凌) 하늘소(霄)자로 쓰이는데 지역에 따라 금등화라고 불리기도 했다. 능소화보다는 금등화라는 이름이 훨씬 이미지에 맞는데, 어찌하여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 하늘 같은 양반을 업신여기거나 능가하지 말라고 그리 이름을 지은 것인가. 꽃 속에도 천함과 귀함을 두었으니 우리 양반님네들은 세심한 곳까지 신경 쓰느라 얼마나 피곤했을까. 귀한 대접은 그리 하라고 일러서 받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우러나와야 걸맞게 대접해주는 것이 아니던가. 이 꽃의 이름을 그리 지은 것은 양반을 능가할 인물이 언제든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불안을 떨쳐 버리기 위해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능소화가 지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가슴이 툭 내려앉는다. 대개 꽃잎을 한잎 한잎 떨구며 애잔함을 자아내는 꽃이 많은데 능소화는 그렇지 않다. 시드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다. 꽃 색깔이 누렇게 변할 새도 없이 속절없이 툭 지고 만다. 넝쿨 장미의 꽃잎이 난분분 지고 나면 뒤따라 능소화 꽃이 툭툭 떨어진다. 그야 말로 아무 미련이 없다. 넝쿨장미와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시들어서 추한 모습을 보이기 전에 저 버리는 능소화, 매혹적인 자태만큼 지는 모습도 매력적이다.

   식은 바람이 그리운 한 여름, 시원스레 꽃을 피운 능소화를 보고 더위를 잊어보는 것도 좋겠다. 능소화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그 꽃에 눈이 먼다면 그것도 더위를 잊을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겠다. 그리하여 또 한 계절이 가고 나면 그 여름의 뜨거움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태양과 맞서던 능소화의 얼굴을 그리며. 그 때는 이미 능소화의 꽃도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 (2005.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