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가운 햇볕 아래서는 모든 것이 눈부시다. 초록이 지천으로 뒤덮은 산등성이에는 생명의 기운이 승할대로 승해 보는 것조차 눈부시다. 요즘 산등성이를 올라보면 어디선가 은은한 꽃 내음이 풍긴다. 마음을 은근히 어지럽히는 향기를 찾아 두리번거리노라면 자주색 꽃잎을 다복하게 달고 있는 칡넝쿨이 보인다. 주변의 교목을 칭칭 감고 오른 칡은 여름의 기운을 몽땅 들이마시는 듯 그렇게 기운차 보일 수가 없다. 금빛 털이 부숭부숭 난 넝쿨과 손바닥만하게 펼쳐진 칡잎 사이에, 칡꽃이 수줍은 여인의 볼연지처럼 붉게 피어있다. 어찔한 현기증마저 일으키는 칡꽃의 향기, 그 곁에는 벌들이 꿀 잔치를 여느라 웅웅웅 여념이 없다. 칡꽃은 얼마나 흐뭇할까.

   햇볕이 내리쬐는 산등성이 산소 앞에는 여름 꽃이 한창이다. 보랏빛 무릇, 노란 짚신나물, 붉은자주색의 패랭이꽃. 초록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 곳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패랭이꽃이다. 패랭이꽃의 진한 핑크빛 꽃잎은 초록색 위에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고개 꼿꼿이 들고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 없는 얼굴을 드러낸 패랭이꽃은 오만하고 도도하다. 따가운 햇살도 패랭이꽃의 고개를 숙이게 할 수 없다. 처음 그 꽃을 보았을 때 어쩜 이렇게 똑 떨어지는 꽃이 있을까, 모양도 빛깔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면서도 도도한 기가 넘쳐흐른다는 생각을 했다.
   패랭이꽃은 건조한 땅에서 잘 자란다. 바위틈이나 모래언덕 위에 붉은자주빛을 태우며 오롯이 피어난다. 패랭이라는 이름이 붙은 연유는 꽃 모양새가 댓개비로 엮어 만든 갓 모양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옛날 역졸(驛卒)이나 상제(喪制) 등이 쓰던 모자를 생각하면 된다. 그 모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패랭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내 나이 아홉 살, 고향을 떠나 올 때 이삿짐 트럭에서 내다본 언덕에는 패랭이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바람에 고개를 살살 흔들던 패랭이꽃. 고향을 떠나는 어린 나에게 끝까지 손을 흔들어 준 것은 모래 언덕 위에 핀 패랭이꽃이었다. 어른이 되어 고향 땅이 아닌 다른 곳에서 패랭이꽃을 만났을 때 달려가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다. 고향의 어린 동무를 만난 것처럼.

   패랭이꽃에는 도도한 여인의 콧대로 인해 생겨난 슬픈 사연이 들어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미모가 빼어난 처녀가 있었다. 처녀는 콧대가 아주 높아 웬만한 총각이 혼인을 청해 오면 모두 마다했다. 그러다 혼기를 놓친 처녀는 할 수 없이 이웃 마을 총각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총각은 가난한데다 인물 또한 처녀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었다. 처녀는 시집가는 날은 물론 시집가서도 그 콧대를 꺽지 않았다. 자신처럼 잘난 여자가 못난 남자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만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아들 쌍둥이 다섯을 낳게 되었다. 아들 쌍둥이 다섯을 키우면서도 마음 붙이지 못하고 늘 떠날 생각만 했다. 어딘가에서 자신에게 걸맞은 잘난 남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그녀는 아들 쌍둥이 다섯을 품에 안고 도망을 갔다. 정신 없이 산길을 가다 피곤한 나머지 아들 쌍둥이를 가슴에 품고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 찬바람이 불어와 눈을 떠보니 품에 안았던 다섯 쌍둥이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가 잠들었던 곳 바로 앞에는 낭떠러지가 있었는데 그만 젖먹이 아이들은 엉금엉금 기어다니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만 것이다. 자식을 잃은 여인의 비통함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아기들이 떨어진 자리에 패랭이꽃이 선혈이 낭자한 핏빛 꽃잎을 피워내고 있었으니.
   여름의 막바지나 가을이 시작되는 이 즈음, 산길에서 패랭이꽃을 만나거들랑 콧대 높은 여인네와 어미 때문에 붉은 꽃잎으로 피어난 다섯 쌍둥이의 명복을 빌어주오. 한 가지 더 청하면, 어릴 적 뒷동산에서 뛰어 놀던 동무 얼굴 보듯이 반가이 맞아 주시길. (2004.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