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떠났다. 바닷가로. 밤바다의 고즈넉한 풍경을 즐기기 위해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를 향해 걸었다.
   적막한 어둠 속에 울려 퍼지는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조금 먼길이다 싶었지만 걷기로 했다. 보름을 넘긴 달은 한쪽이 해진 것처럼 약간 기울어져 있다. 달님이 발길을 따라왔다. 어렸을 적, 어두운 고샅길을 걸어갈 때 끝까지 따라와서 머리 위에 밝게 빛나던 달님이 생각났다. 푸른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달이 없었다면 그 밤길을 감히 나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바람결에 향긋한 냄새가 묻어왔다. 향기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딱 좋은 상태, 이럴 때 은은하다는 말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향기를 좇아 길가 풀숲을 보았다. 달빛을 받아 노랗게 빛나는 것이 있었다. 밤에만 피는 달맞이꽃이 땅 위에 작은 달덩이를 만들며 피어 있었다. 오므렸던 꽃잎을 활짝 열고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낮에 달맞이꽃을 보면 '이것이 꽃인가' 할 정도로 보잘 것 없어 보인다. 줄기는 깻대처럼 크고 이파리도 무성한데, 꽃잎은 입을 꼭 다문 채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간혹 비가 오거나 아주 흐린 날은 낮이라도 활짝 핀 모습을 볼 수 있다.

   왜 달맞이꽃은 밤에만 필까? 밤에 활동하는 곤충들을 이용해 수분하기 위한 것이다. 자연은 공평하다. 그래서 더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한곳에 편중되거나 빠트리는 일 없이 섬세하게 챙기는 원리를 갖고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미세한 부분까지 생각한다. 거기 그대로 있으되 세세히 만물을 돌보는 것이 ‘자연’이라는 생각이다. 밤에 활동하는 곤충들에게 달맞이꽃은 얼마나 다행스런 선물인가.
   달맞이꽃은 해방초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해에 들어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방되던 해, 달빛과 같은 밝은 빛을 어둠 속에서 발하던 달맞이꽃은 우리 조상들에게 반가운 손님이었을 것이다. 볕이 잘 드는 곳이면 길가나 빈터 등, 아무 곳에나 잘 자란다. 웬만한 관목 줄기처럼 곧고 굵게 줄기를 세우며 자라나 생명력이 강해 보인다. 노란 꽃잎은 네 장이고 밤이면 활짝 피다가 아침이면 시드는 것이 특징이다.

   달맞이꽃에는 달님을 그리워하다 죽은 인디언 소녀 '로즈'의 사연이 들어있다. 로즈의 부족은 태양신을 숭배했는데 이상하게 로즈는 달을 더 좋아했다. 이 부족은 해마다 여름이면 축제를 벌였는데 처녀들이 단장하고 한 줄로 서 있으면 총각이 한 사람씩 나와 마음에 드는 처녀를 골라 결혼하는 풍습이 있었다. 로즈가 열네 살 되던 해, 축제를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추장의 작은 아들을 만나게 되었다. 로즈는 추장의 작은 아들과 사랑에 빠졌다. 다음 해 축제에 자신을 선택하리라 믿었던 추장의 아들이 그만 다른 처녀를 골랐다. 다른 남자가 청혼해 오자 로즈는 매정하게 뿌리쳤다. 그 부족은 남자의 청혼을 거절한 여자는 귀신의 골짜기로 쫓겨나는 풍습이 있었다. 로즈는 귀신의 골짜기에서 달을 쳐다보며 사랑하는 추장의 아들이 찾아와 주길 기다렸다. 일 년여의 세월이 흐르자 추장의 아들은 문득 로즈를 떠올렸다. 자신 때문에 귀신의 골짜기로 쫓겨난 로즈를 그제야 불쌍하게 여긴 것이다. 추장의 아들이 그곳에 갔을 때는 짐승의 울음소리만 들끓었다. 로즈를 불러 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대신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 왔는데 희미한 달빛 아래 수줍은 듯 피어 있는 꽃이었다. 죽어서도 로즈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듯 밤이면 달을 보는 달맞이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달맞이꽃이 없었다면 바다로 가는 먼 길이 무척 지루했을 것이다. 달맞이꽃의 향기를 맡으며 도착한 해변은 고즈넉한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휘황한 상가의 불빛과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로 불야성을 이루는 곳이 되었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파도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파도소리는 노래 소리와 폭죽소리에 묻혀 먼 곳에서 들리는 또 하나의 소음이었다. 거기다 물이 가장 많이 빠진 때라 바닷물을 보려면 갯벌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했다.
   다시 터벅터벅 걸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 여전히 달맞이꽃이 반기고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위로하여 주는 것은 바닷바람에 묻어오는 달맞이꽃의 향내와 활짝 핀 꽃의 얼굴이었다. 올 여름, 밤길에 만났던 달맞이꽃의 추억을 잊지 못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