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부드러우나 산 속에는 여전히 흰눈이 덮여 있다. 늦은 폭설로 인해 겨울의 잔해는 골짜기마다 뿌려져 있다. 나무들은 꽃눈과 잎눈을 열기 위해 부지런히 자맥질하는데 그들의 발치에는 여전히 하얀 눈이 소복하다. 그래도 봄은 온다. 봄은 눈을 녹이며 물 밀 듯 밀려오는 벅찬 기운으로 곧, 산천에 색실을 뿌릴 것이다. 잔하얀 눈밭 속에 진초록 잎을 내밀고 있는 식물이 있다. 언 눈덩이를 매단 채 푸른 이파리를 내놓고 있는 것이 바로 노루발풀이다. 겨울 산 속을 다닐 때면 소나무 밑에서 어김없이 노루발풀을 만난다. 노루발풀은 제비꽃처럼 줄기가 없고 뿌리에서 잎이 나온다. 그 대신 잎자루가 줄기처럼 길다. 잎자루 끝에 진초록 이파리는 흰 눈 위에 천연덕스럽게 누워있다. 눈 속에 있어도 추위를 즐기는 것처럼 여유로워 보인다. 노루발풀의 잎사귀는 두툼하며 잎맥따라 하얀 선이 그물처럼 그려져 있다. 왜, 이름이 노루발풀일까. 이파리가 노루발을 닮은 것일까, 아니면 열매 모양이? 아직 열매를 보지 못했으니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얼핏보면 눈 위에 내민 이파리가 혹 노루발자국처럼 보여서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늘노루발풀은 나무 밑이나 낙엽 수북한 그늘에서 잘 자란다. 5월 말경이면 파리하고 핼쓱한 꽃대가 올라온다. 그렇게 모진 추위를 견디고 늘 그늘 속에 숨어 있어서 어떤 꼿이 필까, 아니 꽃이 피긴 필까, 궁금했는데. 오, 세상에 이렇게 앙증맞은 꽃이 피다니‥면 툭 꺾일 것 같은 여린 꽃대 위에 오종종 하얀 종이 고개를 떨군 채 피어난다. 은방울꽃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잔 솜털을 달고 꼬므락 꼬므락 움직이는 아기손 같다고 할까. 은방울꽃은 만들어 놓은 것처럼 완변학 아름다움이 있는 반면 노루발풀은 소박하면서도 정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다고 할까. 추운 겨울을 이기고 눈 속에 피어서 더욱 정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하얗게 벌어진 다섯 장의 꽃잎 속에는 암술이 기다랗게 나와있다. 나무 밑 그늘 속에 숨어 피다 보니 벌과 나비가 많이 날아들지 않을 것이다. 꽃 또한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기 때문에 눈에 뜨이지 않는다. 나름대로 번식을 위해 암술을 길게 빼 놓았을 것이다 나우리나라의 산야에 피는 꽃은 대부분 약재로 쓰이는데 노루발풀은 어디에 쓰였을까. 칼에 베인 상처나 뱀, 독충에 물렸을 때 노루발풀의 잎을 으깨어 즙을 문지르면 출혈이 멎고 통증이 없어진다고 한다. 또한 뿌리부터 꽃까지 전체를 말려 가루로 만들어 피임약으로도 쓰였다. 옛 여인들이 임신을 원치 않거나 원치 않은 임신을 했을 때 찾았을 노루발풀, 그래서 그렇게 신생아 배냇저고리 같은 꽃이 피는가. 한 겨울, 눈밭에서 만나서 애잔하고, 여린 꽃이 피어서 더욱 애잔한 노루발풀. 노루발풀 꽃이 피면 봄은 왔나 싶은데 벌써 가고 있겠지.
사진 자료는 생태교육연구소 <터>에서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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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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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고임님!!!
김선영
200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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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글을 올려 드리지 못해 참 죄송한 마음이구요, 가끔 들러 야생화의 숨은 모습을 훔쳐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임님도 이 방에 놀러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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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고임님!!!
임창순
2004-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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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먼저 허락을 맡고 글을 사용해야 했음에도 그러지 않은 저의 잘못이지요. 님의 글이 야생화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리라고 확신합니다. 좋은 글...자주 와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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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서 만난, 노루발풀
김선영
200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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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질문있어요~~ ^^
심현철
2004-06-19
12253
지칭개란 야생화에 대해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제 14화 지칭개 소개하신 부분에~ 질문 게시했더든요~~~ 질문 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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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지칭개에 대하여
김선영
2004-06-20
11918
지칭개에 대한 이름의 유래나 전설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냥 제 나름대로 추측하건데, 지칭개는 맛이 무척 쓰기 때문에 잘근잘근 지친 다음 먹게 되는데 그래서 지칭개란 이름이 붙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기록이나 문헌에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추측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리고 지칭개이야기를 할 때는 꼭 '지칭개가 지천으로 피어있다'라는 말을 덧붙이는데요, 초여름 지천으로 피어나 지칭개라는 이름을 얻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도 해봅니다.
잔하얀 눈밭 속에 진초록 잎을 내밀고 있는 식물이 있다. 언 눈덩이를 매단 채 푸른 이파리를 내놓고 있는 것이 바로 노루발풀이다. 겨울 산 속을 다닐 때면 소나무 밑에서 어김없이 노루발풀을 만난다. 노루발풀은 제비꽃처럼 줄기가 없고 뿌리에서 잎이 나온다. 그 대신 잎자루가 줄기처럼 길다. 잎자루 끝에 진초록 이파리는 흰 눈 위에 천연덕스럽게 누워있다. 눈 속에 있어도 추위를 즐기는 것처럼 여유로워 보인다. 노루발풀의 잎사귀는 두툼하며 잎맥따라 하얀 선이 그물처럼 그려져 있다. 왜, 이름이 노루발풀일까. 이파리가 노루발을 닮은 것일까, 아니면 열매 모양이? 아직 열매를 보지 못했으니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얼핏보면 눈 위에 내민 이파리가 혹 노루발자국처럼 보여서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