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단풍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길을 오가다가도 산을 오르다가도 시선을 사로잡는 건 단풍이었다. 작년에도 이랬던가? 샛노란 은행잎이 새삼스러웠다. 빨간 단풍나무 잎이 낯설기까지 했다. 나이 탓인가? 친구에게 얘기했더니 올해 청주의 단풍색이 유달리 짙고 예쁘다고 한다. 일교차가 커서 그런가? 서로 말끝을 흐리며 단풍 얘기를 접었다.
올 단풍이 별스러운 것이 내 탓인지, 기후 탓인지 그건 아직 모르겠다. 이젠 단풍도 지고 활엽나무는 가지만 남았다.
요 며칠 날씨가 무척 추웠다. 세찬 바람 속에 눈발이 날리는 날, 어느 아파트 담장 너머에 있는 개잎갈나무 한 그루를 보게 되었다. 하얀 눈발 속에 푸른 잎을 달고 있는 개잎갈나무는 단연 눈에 띄었다. 짙은 초록색 이파리 위에 희끗희끗 눈까지 얹고 있었으니. 차창 밖으로 본 개잎갈나무가 어찌나 추워 보이던지. 이파리를 죄 떨군 가로변의 느티나무와 벚나무가 그렇게 당당해 보일 수 없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가지 사이로 유유히 바람을 통과시키며 하늘을 향해 가벼웁게 빈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홀가분해 보였다. 누가 옷 벗은 겨울나무를 춥다고 했던가. 오히려 사시사철 같은 색 옷을 입은 상록수가 더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 끝에 바늘처럼 달린 수많은 이파리를 건사하려면 이 추운 겨울이 얼마나 버거울까.

개잎갈나무는 가지가 땅과 수평이 되게 뻗으며 가지 끝에 짙은 초록색 잎이 달린다. 가지 끝이 밑으로 축 처지기 때문에 눈이 내리는 날에는 생기를 잃고 얼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어쩌면 개잎갈나무도 사철 푸른 잎을 달고 햇볕을 모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상록수가 영하의 추위에도 견딜 수 있는 건 그들만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모진 추위에도 세포가 얼지 않게 물을 밖으로 빼내 세포와 세포 틈새만 얼게 한다. 밖으로 물이 빠져 나간 세포는 쭈그러들지만 속은 멀쩡하다. 물이 빠져나간 세포 속은 용질의 농도가 높아지고 항 결빙(抗 結氷) 물질이 들어차 있어서 얼지 않는 것이다. 한겨울에도 추위를 타지 않는 그들만의 비법이 있다니, 나무는 알면 알수록 대단하다.
작년 3월 폭설로 인해 소나무 가지가 찢겨지거나 뿌리째 뽑힌 일이 있었다. 다복한 솔잎 위에 내려앉은 눈을 고스란히 견뎌내야 했으니 얼마나 힘에 부쳤을까. 결국 가지가 부러지거나 뿌리가 뽑히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반면 활엽수들은 끄덕 없었다. 아무리 눈이 많이 내려도 가지가 비어서 땅으로 훌훌 내려 보내기 때문이다.
이제야 알았다. 올 단풍이 왜 그리 빛깔이 고왔는지, 왜 그리 곱게만 보였는지. 봄부터 가을까지 함께 했던 것을 놓기 전에 마지막으로 화장을 곱게 한 모습이 어찌 사람의 눈에 들지 않을 수 있으랴. 주어진 만큼만 갖기 위해 이파리를 모두 떨구는 활엽나무처럼 사람도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고운 단풍이 말해준 것이 아닐까.
눈보라 속 개잎갈나무가 그토록 시려 보인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나무가 말한다. 오늘도 나무에게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