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이 나이 먹도록 내가 아직도 나를 잘 모른다고. 얼마 전 미용실의 미용사가 직모에 말총머리인 줄 알던 내 머리칼이 반 곱슬이란다. 무슨 소리냐고 했지만 반곱슬이기 때문에 파마를 하지 않아도 머리칼이 안으로 동그랗게 말린단다. 돈 안 드는 좋은 머리칼이라는 말도 덧붙여준다. 사십을 넘긴 사람이 갑자기 혈액형이 바뀌었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한 채 미용실 문을 나선다. 그것도 모르고 돼지털에, 모공 하나에 머리칼이 세 가닥씩 났을 거라며 숱 많다고 구박까지 했었다. 여태껏 제 머리칼이 곱슬인지 직모인지 파악도 못하고 살았다니.
   또 한 가지 모르고 산 게 있다. 웃기 잘하고 활달한 성격이어서 나 자신은 낯가림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모임 저 모임에 새로운 회원이 들어올 때마다, 어울리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 사람과 자연스럽게 얘기가 오가고 마음 틀 때까지 시간이 꽤 많이 걸린다는 것을 알았다. 왜 그러지? 낯가림 때문이었다. 나도 낯가림을 하는구나.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 참 오래 살다보니 별 소리를 다 듣네.’하면서 코웃음을 칠 일이다. 하지만 웃지 마시길. 그간 몰랐던 내 고질병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니.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한 경계와 탐색, 그것이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않는 원인이었다. 파릇한 이십 대도 아니고 이 나이에 낯가림이라니. 고쳐 보려고 해도 태인 대로 산다고 했던가.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낯가림이라는 얼음덩이가 불쑥불쑥 수면 위로 치고 올라온다. 여전히 처음 본 사람한테는 점수가 인색하다. 마음이 이러할 진대 상대는 더 많이 나의 인색함을 읽을 것이다. 그래서 ‘차다, 무섭다’라는 말을 듣나보다. 알고 보면 나도 괜찮은 사람인데. 알 때까지 요즘 사람들이 느긋하게 기다려주지는 않는데.

   그렇게 아직껏 내가 나를 잘 모르고 살았듯 몇 년 동안 그렇게 멀리서만 바라보다가 가까이 들여다본 꽃이 있다. 그냥 초여름에 노랗게 피는 나무 정도로 스쳐지나갔다.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고 노랗고 자잘하게 핀 건 모감주나무구나, 그리고 여름이구나, 했다.
   헌데, 얼마 전에 노랗게 핀 모감주나무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게 모감주나무 꽃이야? 나도 모르게 반문을 하고 만다. 그냥 수수하게 피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보통 멋을 부린 게 아니다. 모감주 꽃을 가까이 대하는 순간 화장을 요염하게 한 후, 학식 높고 점잖은 선비들만 상대했던 조선시대 기생이 떠올랐다. 꼭 그랬다. 이렇게 여수처럼 생기다니. 멀찍이 떨어져 볼 때와 영판 다른 모습이다. 초록의 이파리 위에 노란 꽃이 자잘하게 필뿐 튀지 않는 수수한 나무라고 생각했다.
   모감주나무꽃은 조그마한 꽃들이 모여 피는데 혀꽃 모양의 꽃잎 4개가 한쪽으로 몰려 있고 수술이 한껏 앞으로 나와 있다. 꽃잎 안 쪽에 빨간 립스틱을 바른 것처럼 포인트를 주었다. 곤충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유인색이다. 꽃이 작고 초록이 무성한 잎사귀 위에 노랗다보니 눈에 띄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꽃가루받이를 위해 정성을 다한 모습이 꽃잎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초가을 무렵이면 꽈리모양의 주머니가 달린다. 삼각모양의 복주머니가 다닥다닥 달리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풍족한 느낌을 준다. 삼각모양의 얇은 막 안에는 까맣고 딱딱하며 윤기가 나는 씨앗이 들어 있다. 이 씨앗으로는 스님들이 쓰는 염주를 만들기도 하여 ‘염주나무’라고도 불린다. 열매가 익으면 꽈리처럼 생긴 막이 세 갈래로 터지게 되는데 그 속에는 3개의 씨앗이 달려있다.
   중국에서는 학덕이 높은 선비가 죽으면 묘지 옆에 심어주는 품위 있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중국에서 들여온 나무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안면도와 강원도 서해와 남해의 해안을 따라 자생한다.
   말린 꽃잎은 요도염, 장염, 치질, 안질의 치료제로 쓰인다. 꽃부터 씨앗까지 그 쓰임이 요긴하다. 자연은 말 그대로 거기 그대로 있으면서 만물을 위해 끊임없이 베푼다.

   멀리서 똑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바라보면 모감주나무꽃은 그냥 수수하게 피는 여름꽃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숨겨진 내밀한 열정도 알게 되고 그 때문에 보는 눈빛도 따뜻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알고 보면’ 참 괜찮은 사람인데, 그 알기까지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진짜 아까운 사람을 놓칠 때가 있다.
   또한 늘 똑같은 거리에서 사람을 바라보면 절대로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절대 그 거리에서 자기 안의 내밀한 슬픔과 기쁨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 년 동안 얼굴을 보며 지내도 늘 그 자리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이라는 말 속에 이렇게 깊은 뜻이 있다니.

   아직껏 나 자신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는데 타인을 알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혹여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그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에게도 내가 모르는 어떤 점이 죽을 때까지 나타날 것이다. 다만 그것을 발견하고 다시 생각해 보는 과정을 충실히 거치며 살 뿐이다.

   무심천 변의 모감주나무꽃이 한가하게 피어 있는 초여름 한낮이다. 초록의 무성한 이파리 위에 작은 별 같이 생긴 꽃을 달고 여름을 즐기고 있다.
   이제는 안다. 뜨거운 여름을 품어 안은 꽃 속에 숨겨진 그들만의 열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