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봄날 같더니 오늘은 쌔무룩이 토라진 여인네처럼 쌀쌀하기 그지없는 한 겨울이다. 그러더니 급기야 희끗희끗 눈발까지 날린다. 변덕이 심한 요즘 날씨를 보니 천상 내 심사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 반갑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하루 중 반나절은 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다가 그 나머지 절반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 거지? 하면서 회의적인 물음을 갖곤 한다. ‘가시나무새’ 노랫말처럼 정말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 나이를 먹어도 정리 안 되는 ‘내가’ 이렇게 많으니, 산다는 건 죽을 때까지 모를 일이다.
   잿빛으로 낮게 가라앉은 하늘과 무덤덤한 땅 사이에 점점이 하얀 눈이 박힌다. 이런 날은 눈 속에 갇히고 싶다. 움쭉달싹 못하게 나를 가두고 싶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 구룡산 자락을 오른다. 인간들에게 산허리까지 내어준 구룡산은 이미 절름발이 신세다. 벌겋게 속살을 드러낸 채 시린 바람을 맞고 있다. 원흥이방죽만이 어울리지 않는 그림 속의 게딱지마냥 덩그마니 놓여있다. 원흥이방죽을 지키는 자도 그곳을 깔아뭉개는 자도 낯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길, 누렇게 마른 풀숲을 뒤져본다. 설마하고 들춰봤는데 벌써 봄맞이 나온 반가운 얼굴들이 있다. 마른풀 아래 숨어서 때를 기다리는 꽃다지와 지칭개, 냉이, 개망초이다. 털을 부숭부숭 달고 오늘처럼 갑자기 찾아오는 추위를 대비하고 있다. 섣불리 고개를 내밀지도 않는다. 마른풀을 이불 삼아 한 겹 덥고 때를 기다린다. 땅에 가장 가까이 엎드려 햇볕의 양과 바람의 온도를 재고 있다. 참으로 묵묵하다.
   땅 위에 초록으로 돋아난 그 모습 자체가 꽃이다. 그래서 이 때 돋아나는 싹을 장미꽃 모양이라고 하여 ‘로제트’라고 부른다. 꽃다지도 냉이도 지칭개도 개망초도 화려한 꽃을 피우지 않아도 이미 그들 자체가 꽃이 되어 봄을 맞이한다. 달맞이꽃도 여름에 피어날 무서운 열정을 꼭꼭 여미며 겨울을 나고 있다. 꽃이 없어도 이미 그 기다림이 꽃이다.
   무덤가에는 할미꽃이 나오려고 기지개를 켜고 있다. 온통 하얀 털로 무장을 했다. 이게 새싹일까, 싶을 정도로 하얀 솜털을 뒤집어썼다. 조금 있으면 빨간 꽃을 피우며 무덤가의 쓸쓸함을 달래줄 것이다.
먼발치 야산에는 앉은부채가 마른 풀 비집고 올라와 벌써 꽃을 피웠을 게다. 시련 속에 열반에 든 부처의 모습처럼 빛나는 광배를 달고 눈 속에 오롯이 피어났을 것이다.
   매 시간 많은 생각으로 마음을 들볶으며 사는 내가 몹시 부끄럽다. 언 땅 위에 뿌리를 박고 있는 그들에게 미안하다.
   들추었던 마른 풀을 그대로 덮어두며 산길을 내려온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묵묵해야 할 터인데, 자신이 없다. 꽃.다.지. 지.칭.개. 냉.이. 개.망.초를 또박또박 소리 내어 말해 본다. 그들처럼 살아야할 텐데. 어차피 산다는 건 언 땅 위에 뿌리내린 채 시린 발 녹이며 한바탕 추는 춤 같으니.
   그래도 여전히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