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왔다. 밀양 사는 큰언니다. 대추가 풍작이란다. 태풍이 무사히 지나갔고 일조량이 좋은 덕이라고 한다. 대추 한 알에는 바람의 너그러움과 햇살의 넉넉한 기운이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 손에 닿을 수 있다. 매 년 태풍이 휩쓸 때마다 옥구슬 같은 대추가 우수수 떨어졌다. 속수무책으로 그것을 지켜봐야 했던 숱한 시간, 언니의 심정은 심장에서 피가 뚝뚝 듣는 것 같았을 것이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비켜간 큰바람님께 감사할 뿐이다.

   몇 해 전에 대추 따는 것을 돕는다고 내려간 적이 있었다. 농사일이 바쁘면 부지깽이도 춤춘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바삐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긴 장대로 대추를 털고 떨어진 대추를 줍느라 허리 한번 펼 새 없었다. 주운 대추를 자루에 모아 집으로 운반하면 어느 새 마당에는 대추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대추는 건조기에 들어가기 전에 서너 번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는다. 하루의 일과는 새벽 한 시가 넘어도 끝나지 않는다. 언니네 식구들은 밤늦도록 대추를 씻고 건조기의 대추를 갈무리하고 다시 새 대추를 안치느라 새벽까지 자리에 들 수 없다. 딴에는 손님이라고 일찍 자라고 청하여 자리에 들었지만 도무지 구들을 지고 누울 수가 없었다. 차가운 새벽 달빛 아래 철벅이던 물소리, 언니집 식구들은 지친 기색도 없이 대추를 갈무리하고 있다. 처음 보는 광경인지라 그저 외지 식구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무서웠다. 내 생활 패턴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노동이었다. 그 후 한동안 언니네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대추 딴다는 소리만 들어도 무서웠다. 고된 노동을 지켜보는 것도 내겐 겁나는 일이었다. 대추는 그렇게 우리 손에 온다.
   대추나무는 항상 사람들 곁에 있다. 앞 마당에 뒤란에 개울가에, 어디든 눈 돌리면 한 그루씩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 고향 마을 풍경이다. 봄이면 반들반들한 이파리를 틔운 후 보일 듯 말 듯한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가지마다 옥구슬 같은 열매를 달고 가을이면 붉그족족하게 물든 대추를 내놓는다.
   어렸을 적, 걸레를 빨아 오라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개울가에 간 적이 있다. 햇살 따뜻한 봄날이었다.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하고 햇살만 온 동네에 뛰놀고 있었다. 개울가에 다다랐다. 싹을 틔운 연두빛 대추나무 잎이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개울가로 기운 나뭇가지 위에 스르륵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황금구렁이었다. 막 내리쬐는 햇살을 받은 구렁이의 몸은 누렇다 못해 금빛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일렁이는 황금비늘,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긴장감으로 그 자리에 못박인 듯 서 있다가 걸레도 집어 던지고 집으로 내달렸다. 헐레벌떡 집안으로 뛰어들어오는 어린 딸의 수다를 듣던 엄마는 ‘그거 여간해서 보기 힘든 건데.’라는 말을 흘렸다. 그래서일까. 징그럽다거나 무섭다는 생각보다 그것을 본 것이 어쩌면 행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흐른 뒤 대추나무를 생각하면 영락없이 황금구렁이도 스르륵 기어 나온다. 노란 햇살과 연두빛 잎사귀, 금모래 깔린 개울 물, 거기에 황금 구렁이 한 마리, 참 따스한 풍경이 내 가슴속에 한 컷의 사진으로 자리잡고 있다.

   옛날 단오 날에는 대추나무를 시집 보내는 풍속이 있었다. 나무 줄기가 둘로 갈라진 곳에 돌을 끼워 주거나 낫으로 가지를 이리저리 채서 상처를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대추가 많이 열린다고 하였다. 태몽으로 대추나무나 대추를 보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으면 제사를 지낸 뒤 대추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기도 했다.
   또한 대추는 농사 지표로도 쓰였다. 대추알이 콧구멍에 들어갈 정도에 모를 심어도 그 해 먹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늦어도 그 때까지는 모를 심어야 한다는 뜻이다. 귀농한 사람이 동네 할머니께 콩은 언제 심어야 하냐고 물어보았는데 할머니 왈, “몇 월 몇 일, 난 그런 거 몰러, 감꽃 지면 심으믄 되야.” 모월 모일 쯤에 심으라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한 시기를 일러 주는 것이 아닌가. 매 년 같은 시기여도 기후는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감꽃 지는 것보고 콩 심고, 대추알보고 모 심고. 자연은 하나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인간은 자연 없이 한 가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헛똑똑이 그물코일 뿐이다.
   대추나무는 죽어서도 그 몫을 다 한다. 특히 벼락맞은 대추나무는 그 쓰임이 요긴하다. 도장을 파기도 하고 부적을 만들기도 한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부적은 특히나 영험하단다. 신혼 때 시어머님께서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부적을 주신 적이 있다. 엄지손가락 길이의 직사각형 모양의 목걸이 팬던트처럼 생겼는데 글자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것이 새겨져 있었다. 부적이니 점이니 하는 것은 미신이라고 여기던 때라 받기가 꺼림직 했다. 솔직히 싫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시어머님 말씀이 “이거 소홀히 간수하다가 잃어버리면 더 안 좋댜.” 하는 것이었다. 에라 잘 됐다. “그러면 어머니, 저 이거 안 가져갈래요. 가지고 있다보면 잃어버릴 수도 있고 어디로 없어질지도 모르는데 더 안 좋다면 안 갖는 게 더 낫잖아요.” 참, 철부지에 저 잘난 멋에 산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핑계 김에 잘됐다고 아예 누워 버린 철없는 며느리였다. 무안해 하시며 끝내 내 손에 부적을 쥐어주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는 시어머니를 뒤로하고 집으로 와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부끄럽다. 네, 하고 받아왔으면 어머니께서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지금 다시 주신다면 얼른 받을 것이다. 살아보니 사람의 일이란 제 의지대로만 되는 것이 아님을 이제야 안다. 헌데, 때는 이미 늦었다. 어머니는 이제 부적의 비읍자도 꺼내지 않는다.
   이렇듯 대추나무는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추억으로, 풍성한 열매로, 지킴이로, 제사상의 필수품으로 가까이 있다. 대추나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러 삶을 풍요롭게 해줄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