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친 다음 날, 바람은 가을처럼 서늘하다. 딱 이만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공연히 늦더위가 걱정스럽다. 고개를 길게 빼고 언덕 넘어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성내 방죽 옆, 도로 가에 청보라빛 닭의장풀이 환하게 피어있다. 꽃잎의 색깔을 보면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정도로 청명한 느낌이 드는 빛깔이다. 마치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쓰던 '깐드레' 불빛 같아 보인다. 푸르게 우거진 수풀 속에 파랗게 타오르는 꽃잎을 보면 절로 환한 빛이 드는 듯하다.

   농가의 닭장 부근에서 잘 자란다고 하는 닭의장풀은 달개비, 닭밑씻개, 닭꼬꼬라고도 불린다. 예전에는 꽃잎으로 즙을 내어 비단에 남색 물을 들이기도 했다. 여름철 길가나 들에 흔하게 자라서 어린순은 나물로 먹고 줄기와 잎은 치질과 종기의 통증치료로 쓰였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 약간 습한 곳에 많이 자라던 꽃이 아니었나 싶다. 축축한 그늘에서 잘 자라고 이 꽃 또한 질 때는 녹아들어서 일명 ‘녹는꽃’이라고 불렸다. 청보랏빛 꽃잎이 자져 붙듯 녹아들며 지는 닭의장풀.

   닭의장풀 꽃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장의 꽃잎 사이에 노란색 수술대가 여러 개 보인다. 노란 리본 같이 생긴 세 개의 짧은 수술에는 꽃밥이 달려 있지 않다. 기다랗게 나와 있는 세 개의 수술에도 두 개는 꽃밥이 달려 있지만 한 개는 노란 리본 모양으로 가짜 꽃밥 모양을 하고 있다. 이렇게 닭의장풀은 헛수술로 치장을 하고 곤충을 유혹한다. 곤충들은 바닷물같은 청보랏빛 꽃잎을 보고 노란 리본처럼 생긴 헛수술에 유혹되어 달려드는 것이다. 꽃이 얼마나 치장을 많이 하는지, 씨앗을 맺기 위한 본능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닭의장풀 꽃잎을 보면 뭐가 연상되는지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아이들은 역시 이미지 연상은 가히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미키마우스 귀. 그러고 보니 미키마우스의 둥그렇게 솟아오른 두 귀가 딱 들어맞는다. 이제 아이들은 닭의장풀이라는 이름을 기억 못할지라도 미키마우스꽃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닭의장풀은 남정네들의 힘 자랑에 애가 타서 죽어버린 아녀자들의 한이 서려있는 꽃이기도 하다. 어떤 마을의 두 남정네가 서로 힘 자랑을 했는데 우열을 가릴 수가 없어 다음 날 첫 닭이 울면 바위를 안고 물 속에 깊이 가라앉기 시합을 하기로 했다. 그들의 아낙네들이 밤을 새워 닭장 앞에 앉아 새벽닭이 울지 않도록 닭 모가지를 비틀며 막았건만, 어찌 오는 새벽을 막을 수 있으랴! 새벽닭이 홰를 치며 울자 두 여인네는 그만 애가 타서 죽어버리게 되었다. 그 자리에 두 장의 꽃잎으로 피어난 것이 바로 닭의장풀이다. 그러고 보니 두 장의 짙푸른 잉크 빛깔의 꽃잎에 노란 꽃술을 매달고 있는 닭의장풀에서 애잔한 여인네의 눈망울이 연상되기도 한다.
   축축한 여름 숲 그늘, 닭의장풀은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계절의 오고감을 지켜 볼 것이다. 푸른 잉크를 풀어놓은 듯한 가을 하늘빛을 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