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하루가 다르게 햇볕의 농도가 짙어집니다. 바깥에 나갔다 들어오면 두 볼이 후끈 달아오릅니다. 느티나무는 어느 새 깊은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을 품에 안고 있더군요. 저도 잠시 그 그늘에 들어가 따가운 햇볕을 피했습니다. 느티나무 아래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나뭇잎과 나뭇잎 틈새로 반드시 하늘이 보입니다. 느티나무는 가지도 많고 그 가지에 잎 또한 셀 수 없이 많이 달립니다. 이파리끼리 햇볕 경쟁하느라 틈이 없을 것 같아 보지만 용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배려하듯 빛을 아래로 아래로 내려보내 줍니다. 소나무 같으면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마을의 전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 법한 정자나무는 울울창창 가지를 뻗어 넓은 품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느티나무는 여러모로 심성이 고운 나무입니다.

  야산 입구에는 찔레꽃이 한창입니다. 찔레꽃 곁으로 다가가면 은은한 장미향이 하얗게 밀려옵니다. 찔레꽃을 보면 사람이 죽었을 때 머리에 꽂는 상장이 떠오릅니다. 하얀 헝겊으로 나비 모양의 리본을 머리에 꽂고 하얀 상복을 입은 여인네가 생각납니다. 그래서 찔레꽃 한 송이를 따서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하얀 얼굴에 주근깨가 다닥다닥 박혀 있는 듯한 수술이 달려 있고 다섯 장의 꽃잎은 끝이 나비 모양으로 약간 들어가 있었습니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더욱 아련한 슬픔을 느낄 수 있더군요. 그 찔레꽃 앞에서 펑펑 울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나를 일찍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무덤 앞인 양.
햇볕은 뜨겁게 내리쬐고 그 후끈한 열기에 찔레향은 더욱 진하게 묻어오고, 그러고 보니 찔레향 속에도 슬픔의 빛깔이 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울컥 또 울고 싶어지더군요.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찔레꽃 노랫말입니다. 노랫소리도 얼마나 서글픈지, 길가다 이 노래를 부르면 저절로 콧등이 시큰해집니다. 어렸을 때 찔레순을 많이 따먹곤 했습니다. 약간은 떫은맛이 나면서 장미향이 입안에 감돌았다는 기억이 나는군요. 옛날에는 이맘 때 산에 오르면 유일한 간식 거리가 바로 찔레순이었습니다. 마땅히 열매 맺는 것이 없고 죄다 꽃을 피워 수분하기에 바쁜 시기이기 때문이죠. 찔레순을 한 움큼 따서 집으로 가져와 껍질을 벗긴 후 언니들과 나눠먹던 기억이 납니다.
 찔레꽃에는 찔레 아가씨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옛날, 몽고가 쳐들어 왔던 고려시대이야기입니다. 전쟁에 진 고려는 몽고에 재물과 공녀를 바쳐야 했습니다. 어느 마을의 찔레라는 소녀가 몽고의 귀족 집으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찔레는 잘해주는 주인집 식구들과 편안하게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향에 두고 온 식구들이 보고 싶어 잠도 잘 수 없었고 밥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주인댁은 사람을 고려로 보내 찔레의 식구들을 찾아 몽고로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바람에 찔레는 기운을 차려 식구들을 기다렸는데 결국 식구들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찔레가 다시 자리에 눕게 되자 주인댁은 찔레를 고려로 보내주게 되었습니다. 찔레는 고향 마을에 찾아 살던 집을 찾아보니 그 집은 불타 없어지고 식구들의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찔레는 얼굴이 까맣게 타도록 식구들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 자리에 하얀 꽃이 피어났는데 찔레가 죽어서 피어난 꽃이라 하여 찔레꽃이 되었답니다.

  앞산의 꿩은 짝짓기를 하는지 계속 '꿩꿩' 대며 산자락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습니다. 그 때마다 찔레꽃은 진저리를 치며 파르르 꽃잎을 떱니다. 지금쯤 여행을 하다 산자락 어딘가에 하얗게 무덤을 이룬 것처럼 피어 있는 꽃을 본다면 그것은 바로 찔레꽃입니다. 무덤의 봉분처럼 둥그런 슬픔이 산자락마다 피어나 못다한 삶의 흔적을 찍어 놓고 있지요.

※ 사진 자료는 생태교육연구소 <터> 에서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