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이 되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일상의 때를 벗고 바람에 일렁이는 초록 물결을 따라 마냥 떠나고 싶다.

우연찮게 지리산에 가자는 제안을 받고 선뜻 따라나선 것도 여름만 되면 도지는 방랑벽과 무관하지 않다. 더군다나 지리산은 여느 산 같지 않은 특별함이 있어서 누구나 한번쯤 종주를 꿈꾸는 산이 아니던가. 그 높이나 규모로 보아 함부로 나설 길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골에 땀이 흐르는 이 더위에 산행을 간다는 것이 어쩌면 무모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산행의 고됨을 어찌 이겨나갈지 두렵기까지 했다.

막상 산행에 들어서자 그동안 가졌던 막막한 두려움은 깨끗하게 씻겼다. 초록으로 넌출진 산행 길은 그야말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는 것 같았다. 풀숲에서 풍기는 신선함과 나뭇잎 사이로 얼비치는 햇살은 싱싱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끊임없이 발길을 따라 오는 계곡 물소리는 또 얼마나 화려한 유혹인가. 웅장한 바위 틈새로 흘러가는 청량한 물소리는 산행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한층 가볍게 해주는 듯 했다.

세석산장에서 하룻밤을 묵고 촛대봉을 지나 연하봉에 다다르자 고사목이 나오기 시작했다. 새벽 산행길의 봉우리를 넘어갈 때마다 하얀 구름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세찬 바람과 함께 습기를 잔뜩 머금은 구름 속에 고사목의 모습은 만년의 화석 같기도 하고 허공을 찌르는 날카로운 칼날 같기도 했다.

지리산에서 고사목의 진면모를 볼 수 있는 곳은 제석봉이다. 아무 것도 없는 넓대대한 봉우리에 회색 빛깔로 삐죽삐죽 솟아있으며 봉우리를 넘어 물밀듯이 밀려오는 구름안개에 온전히 몸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가슴이 시리기까지 했다. 제석봉은 나무들의 공동묘지라고 할 만큼 고사목이 많은 곳이다. 죽은 채로 어떻게 저토록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정말 죽은 것일까? 비바람도 구름도 눈보라도 고사목을 꺾지 못했다. 살아 백 년, 죽어 천 년이라는 말이 가슴을 훑고 갔다.

고사목은 도벌꾼들이 도벌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불을 질러 타다 남은 나무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어떻게 이 높은 산까지 올라와 도벌을 하며 장대한 이 자연의 모습 앞에 어찌 도륙할 생각을 했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고사목은 사람들이 부린 욕심의 흔적이자 자연이 그 상처를 쓸어안고 스스로 치유하기 위한 끝없는 견딤이기도 했다.

고사목 아래에는 주홍빛 동자꽃과 하늘말나리가 발그레 등불을 켜고 있고 모시대가 보랏빛 초롱을 들어 위로하고 있다.

봄이 와도 겨울이 와도 항상 같은 모습이지만 그 꿋꿋함이 오히려 힘 있어 보였다. 죽은 나무라기보다 또 하나의 살아 있는 나무로 지리산 자락을 지키며 그 범상치 않음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불에 탔어도 차마 재가 되지 못하고 그대로 살아 허공을 찌르는 바늘 같은 가지를 뻗어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거기 그 자리에 있으면서 항상 받아 주기만 하는 자연은 아니라고, 함부로 대하면 언젠가는 그 대가를 받을 -장터목에서 아들과 함께- 것이라는 것을 죽어서도 경고하고 있는 것 만 같다.

    하얀 안개가 쉼 없이 밀려들며 고사목 우듬지를 쓸고 갔다. 그 장엄함을 뒤로하고 통천문을 지나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잠자리 떼가 난무하는 지리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앉았다. 구름은 천왕봉 아래 첩첩이 놓인 봉우리들을 수시로 가렸다 벗겼다했다. 뿌연 안개 바다에 가렸던 산이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보이지 않았던 봉우리가 어느 순간 나타나기도 했다. 아무나 아무 때나 그 신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지리산의 결연한 의지를 보는 듯 했다. 그 장엄함 앞에 사람은 한 개 점에 지나지 않은 작은 존재였다. 죽어 천 년을 가는 고사목 앞에 사람의 생은 또 얼마나 짧디 짧은가. 고사목이 견디는 세월의 묵묵함을 생각하면 일상의 고달픔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다. 그래, 또 그렇게 힘을 내 살아 보자. (2007.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