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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이 상처 속으로 들어간다


    카라바조, 《의심하는 도마》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1602년경)


    한 남자의 검지가 다른 남자의 옆구리 살 속으로 파고든다. 첫째 마디까지, 정말로 들어가 있다. 상처의 주인은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제 손으로 그 손목을 붙잡아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눈썹을 잔뜩 찌푸린 사내는 벌어진 살을 들여다보느라 세상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카라바조가 그린 《의심하는 도마》는 서양 회화가 그려낸 가장 노골적인 '확인'의 장면이다. 여기엔 후광도, 천상의 빛도, 성스러운 후덕함도 없다. 이마에 주름이 팬 늙은 어부 셋과, 방금 무덤에서 걸어 나온 남자의 살덩어리가 있을 뿐이다.

    이 그림은 신앙의 그림처럼 걸려 있지만, 실은 의심의 그림이다. 그리고 의심이야말로 근대 철학이 세계를 다시 짓기 위해 처음 집어 든 연장이었다.


    [1] 도마라는 이름, 의심이라는 직업

    이야기의 출처는 요한복음 20장이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열둘 가운데 도마(토마스)만 그 자리에 없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도마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요한복음 20:25) 여드레 뒤, 예수가 다시 나타나 도마에게 직접 손을 내민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요한복음 20:27)

    서양 미술사에서 이 사도의 이름은 하나의 관용어가 됐다. 영어로 'Doubting Thomas'는 직접 증거를 손에 쥐어야만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 도마의 죄목은 냉담함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스승을 사랑했기에, 값싼 소문으로 그 죽음을 덮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도마가 요구한 것은 하나였다. 증거. 그것도 말이나 시선이 아니라, 손끝으로 만져지는 증거.

    흥미롭게도 이 요구는 신학의 언어가 아니라 과학의 언어에 가깝다. 남이 봤다는 말로는 안 된다, 내 감각으로 검증해야 한다 — 이것은 1600년대 초 유럽에서 막 태어나던 새로운 정신의 문장이기도 했다. 카라바조가 이 그림을 그리던 무렵, 로마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파도바에서는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하늘로 겨누기 직전이었다.


    [2] 데카르트의 손가락 — 의심이라는 연장

    도마가 상처에 손가락을 넣고 나서 꼭 한 세대 뒤, 한 프랑스인이 도마의 몸짓을 사유의 방법으로 바꿔 놓는다. 르네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성찰』(1641)에서 이렇게 결심한다.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전부 거짓으로 치자. 눈에 보이는 세계도, 내 몸도, 수학의 진리마저도 일단 의심의 도마 위에 올린다. 그렇게 다 허물고 났을 때 마지막까지 무너지지 않는 것이 하나 남는다. '이렇게 의심하고 있는 나'는 있어야 한다. 의심하려면 의심하는 자가 있어야 하니까. 여기서 그 유명한 문장이 나온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데카르트의 회의는 파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시 짓기 위한 철거였다. 무엇이든 의심의 손가락을 찔러 넣어 보고, 그래도 상처 나지 않는 단단한 바닥이 나올 때까지 파고든다. 근대 철학은 바로 이 방법적 회의(方法的 懷疑) 위에 세워졌다. 믿음에서 시작하지 않고 의심에서 시작하는 사고. 권위가 그렇다고 말해서가 아니라, 내가 검증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태도.

    카라바조의 도마는 이 근대적 인간의 육체적 초상이다. 그는 남의 증언을 거부하고, 제 검지를 스승의 살에 밀어 넣는다. 데카르트가 관념의 세계에서 했던 일을, 도마는 손끝으로 했다. 둘 다 같은 것을 원했다.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 의심의 끝에서만 얻어지는 앎.


    [3] 왜 눈이 아니라 손이었나

    여기서 한 가지가 걸린다. 도마는 이미 부활한 예수를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만지려 한다. 왜 보는 것으로는 부족한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론』에서 촉각을 가장 근원적인 감각이라 불렀다. 시각은 속기 쉽다. 거리를 두고 빛을 통해 대상을 받아들이니, 사이에 무엇이든 끼어들 수 있다. 신기루가 그렇고, 물에 잠긴 막대가 굽어 보이는 착시가 그렇다. 반면 촉각은 거리를 없앤다. 만진다는 것은 대상과 내 몸이 직접 맞닿는 일이고, 그 사이엔 속임수가 끼어들 틈이 없다. 우리가 지금도 "직접 손으로 만져 봐야 믿겠다"고 말하는 데는 이 오래된 직관이 깔려 있다. 눈은 증인이지만, 손은 공범이다.

    부활은 시각의 사건으로는 미심쩍다. 유령일 수도, 환영일 수도, 그리움이 빚어낸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손가락이 살 속으로 들어가 저항을 느낀다면, 온기와 무게와 축축함이 만져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환영이 아니다. 도마가 원한 건 이미지가 아니라 물질이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두고도 손을 내밀었다.


    [4] 만지는 자는 만져진다 — 메를로퐁티의 살

    20세기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이 손끝의 순간에서 훨씬 이상한 무언가를 읽어낼 것이다.

    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64)에서 하나의 실험을 제안한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져 보라. 이때 나는 만지는 자인가, 만져지는 자인가? 둘 다이다. 왼손을 만지는 순간, 그 왼손도 오른손의 온기와 압력을 되만진다. 만짐과 만져짐은 한 몸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메를로퐁티는 이 얽힘을 '살'(la chair)이라 불렀다. 세계와 나는 서로 다른 두 사물이 아니라, 만지고 만져지는 하나의 살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도마의 검지를 다시 보자. 그는 예수의 상처를 확인하려 손가락을 넣는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손가락도 상처의 안쪽에 붙들린다. 살의 온기가, 벌어진 조직의 저항이 도마의 신경을 타고 거꾸로 밀려든다. 확인하러 들어간 손이 도리어 붙잡힌다. 카라바조가 그린 예수의 손목 — 도마의 팔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그 손 — 은 이 상호성을 소름 끼치도록 정확히 포착한다. 도마는 검증하는 주체였다가, 어느새 사건에 붙들린 몸이 된다. 그는 만지면서 만져진다.

    앎이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대상을 멀찍이 두고 관찰하는 일이 아니라, 내 몸을 밀어 넣어 되받아 맞는 일. 진짜로 무언가를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결코 안전한 관찰자로 남지 못한다.


    [5]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

    그런데 복음서는 이 장면을 손쉬운 승리로 끝맺지 않는다. 도마가 마침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고백하자, 예수는 조용히 되받는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한복음 20:29)

    여기에 이 그림의 깊은 역설이 있다. 카라바조는 손가락이 살을 파고드는 그 확인의 순간을, 회화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사실감으로 그려 냈다. 그림 전체가 "만져 보라, 이것은 진짜다"라고 외친다. 그런데 정작 복음서의 예수는 그 확인을 나무란다. 만져야만 믿는 믿음은 가장 낮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의심과 신앙은 이 지점에서 갈라선다. 데카르트의 후예인 근대인에게 검증 없는 믿음은 게으름이거나 미신이다. 그러나 신앙의 논리에서 최고의 믿음은 증거가 바닥난 자리에서 도약하는 믿음이다. 키르케고르가 훗날 '신앙의 도약'이라 부른 것이 그것이다. 손가락을 넣어야 믿는 도마는, 역설적이게도 믿음의 세계에서는 낙제생인 셈이다. 카라바조는 이 낙제의 순간을 성화(聖畵)의 한복판에 올려놓았다. 어쩌면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의심하는 도마야말로, 신자보다 우리를 훨씬 닮았다는 것을.


    [6] 상처가 사라진 시대

    이 그림을 지금 다시 보는 이유는, 우리가 만질 상처를 잃어버린 시대에 살기 때문이다.

    도마는 운이 좋았다. 그에겐 손가락을 넣어 볼 옆구리가 있었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물질적 바닥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흐르는 것은 대부분 이미지다. 화면 속 얼굴이 실제 사람인지 인공지능이 합성한 얼굴인지, 그 목소리가 정말 그 사람의 것인지, 우리는 손가락을 넣어 확인할 수 없다. 딥페이크(deepfake) 영상 앞에서 우리는 도마가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다. 찔러 넣을 살이 없기 때문이다. 픽셀에는 상처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의 회의는 데카르트의 회의보다 훨씬 외롭다. 데카르트는 의심의 끝에 '생각하는 나'라는 단단한 바닥을 찾았다. 도마는 상처라는 확실성에 손끝을 댔다. 그러나 무한히 복제되고 합성되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우리의 손가락은 끝내 아무것에도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더듬는다. 검증하고 싶어도 검증할 물질이 없는 것, 그것이 지금의 불안이다.

    어쩌면 카라바조가 400여 년 전 어둠 속에서 끌어올린 저 손가락은, 하나의 질문을 우리에게 남긴 것인지도 모른다. 너는 무엇을 만져 보고 믿는가. 그리고 만질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너의 믿음은 어디에 손을 얹을 것인가.

    카라바조 자신은 이 질문에 답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림을 그린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자가 되었고, 서른여덟에 어느 해변에서 홀로 죽었다. 빛과 어둠을 가장 격렬하게 다룬 화가는, 정작 제 삶의 진위는 끝내 만져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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