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이카로스의 추락'인데, 정작 그림 어디에도 추락하는 이카로스는 없다.
처음 이 그림 앞에 서면 누구나 주인공을 찾는다. 밀랍 날개가 녹아 하늘에서 곤두박질치는 소년, 신화가 약속한 그 극적인 장면을. 그러나 화면을 아무리 훑어도 그런 것은 없다. 봄볕이 내려앉은 항구, 바다로 미끄러지는 범선, 비탈에서 소를 몰며 밭을 가는 농부, 지팡이에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는 양치기, 물가에 웅크린 낚시꾼. 세상은 평화롭고 부지런하다. 이카로스는 어디 있는가. 오른쪽 아래, 배 옆의 물거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두 다리. 그게 전부다. 신화의 절정이 화면의 구석, 그것도 물에 처박힌 두 발로만 남아 있다. 브뤼헐은 이야기의 심장을 그림의 변두리로 밀어냈다.
한 걸음 더 다가가 그림을 뜯어보면, 이 '밀어냄'이 결코 실수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화면의 중심은 이카로스가 아니라 밭 가는 농부가 차지하고 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쟁기 뒤를 따라 걷는다. 발밑의 흙고랑, 말의 엉덩이, 자기 신발 끝. 그의 시선이 닿는 세계는 딱 그만큼이다. 조금 위, 양치기는 하늘을 보고 있지만 정작 등을 돌려 이카로스가 떨어진 바다 반대편을 본다. 낚시꾼은 물에 낚싯대를 드리운 채 발치에서 벌어진 익사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항구를 떠나는 배의 선원들도 뱃일에 바쁘다.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 8권에서 하늘을 나는 이 부자(父子)를 본 농부와 양치기가 "그들을 신으로 여기고 놀라 우러러보았다"고 적었다. 브뤼헐은 그 경탄의 시선을 지워버렸다. 아무도 올려다보지 않는다. 아무도 첨벙 소리를 듣지 못한다.
디테일은 더 잔인하다. 왼쪽 덤불에는 자고새 한 마리가 앉아 있는데,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이 새는 다이달로스가 질투 끝에 절벽에서 밀어 죽인 조카가 변신한 것이다. 조카의 죽음을 지켜본 새가, 이번엔 다이달로스 아들의 죽음을 무심히 지켜본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농부 왼편 덤불 속에 창백한 얼굴 하나가 놓여 있다. 오래전부터 미술사가들은 여기서 플랑드르 속담 하나를 읽어냈다. "사람이 죽어간다고 멈추는 쟁기는 없다(En geen ploeg staat stil om een stervende man)." 누군가 물에 빠져 죽어도, 누군가 덤불에서 숨을 거둬도, 쟁기는 멈추지 않는다. 봄은 오고, 밭은 갈리고, 배는 떠난다. 이것이 이 그림의 진짜 주제다. 비극의 부재가 아니라, 비극에 대한 세상의 무심함.
여기서 시인 한 사람을 불러오지 않을 수 없다. 1938년, 브뤼셀 왕립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본 W. H. 오든은 「미술관(Musée des Beaux Arts)」이라는 시를 썼다.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고통에 관해서라면 옛 거장들은 결코 틀리는 법이 없었다고. 그들은 알고 있었다고 — 끔찍한 순교가 벌어지는 바로 그때에도 개들은 개다운 삶을 계속하고, 고문자의 말은 나무둥치에 무심히 엉덩이를 긁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카로스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소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놀라운 사건에도, 농부는 아마 첨벙 소리와 버려진 비명을 들었겠지만 그것은 그에게 대단한 실패가 아니었다고. 태양은 초록 물속으로 사라지는 하얀 다리를 여느 때처럼 비추었고, 값비싼 배는 소년이 떨어지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겠지만 갈 곳이 있었기에 조용히 항해를 계속했다고.
오든이 그림에서 길어 올린 것은 하나의 냉정한 진실이다. 고통은 언제나 '주변부'에서 일어난다. 나에게는 세계를 무너뜨리는 사건이, 타인에게는 시야 바깥의 작은 물거품일 뿐이다. 철학은 오래도록 이 비대칭을 문제 삼아왔다. 타인의 고통은 왜 나의 고통만큼 절박하게 다가오지 않는가. 20세기의 사상가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윤리가 '타인의 얼굴'과 마주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보았다. 얼굴은 "나를 죽이지 말라"고 말없이 호소하며, 나를 응답하도록 붙든다(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1961). 그런데 브뤼헐의 그림에는 바로 그 얼굴이 없다. 이카로스는 우리에게 등을 보이며, 아니 다리만 보이며 물속으로 사라진다. 얼굴 없는 고통은 호소력을 잃는다. 우리는 얼굴을 보지 못한 고통 앞에서 쉽게 쟁기를 계속 민다.
그런데 이 그림의 서늘함은 한 겹 더 있다. 이카로스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는 아버지의 경고를 어기고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오른, 오만(휘브리스)의 상징이다. 신화는 그의 추락을 '분수를 넘은 자의 응보'로 읽으라 가르쳐왔다. 그러나 브뤼헐은 그 도덕적 심판마저 유보한다. 그의 화폭에서 이카로스의 추락은 응징받아 마땅한 죄인의 최후로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세상 한구석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죽음일 뿐이다. 영웅적이지도 교훈적이지도 않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익사. 브뤼헐은 신화에서 신화적인 것을 빼버림으로써,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남긴다. 한 인간의 몰락이 이토록 사소하게 지나갈 수 있다면, 도대체 우리의 고통은 세상에 어떤 무게를 지니는가.
이 그림이 500년 뒤의 우리를 정면으로 겨냥한다는 사실은, 스마트폰을 켜는 순간 분명해진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타인의 추락을 목격한다. 전쟁으로 무너진 도시, 침몰하는 난민선, 재난의 실시간 영상이 손바닥 안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브뤼헐의 농부처럼 반응한다. 참혹한 뉴스 위로 엄지손가락이 한 번 멈칫하다가, 다음 게시물로, 친구의 여행 사진으로, 점심 메뉴 고민으로 스크롤을 넘긴다. 타임라인은 이카로스의 다리와 농부의 밭갈이를 같은 크기로 나란히 놓는다. 비극과 일상이 등가(等價)로 배열되는 화면, 그것이 오늘의 우리가 사는 브뤼헐의 풍경이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2003)에서, 고통의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우리의 감각은 무뎌지고 연민은 소진된다고 경고했다. 문제는 우리가 냉혹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브뤼헐의 통찰은 더 불편하다. 세상이 계속 돌아가려면 대부분의 고통은 시야 바깥으로 밀려나야 한다는 것. 모든 익사에 쟁기를 멈춘다면 밭은 영영 갈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무의식적으로 선택한다. 무엇을 화면의 중심에 둘 것인가, 무엇을 오른쪽 아래 물거품으로 흘려보낼 것인가. 브뤼헐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 손에 붓을 쥐여줄 뿐이다. 당신이라면, 이 풍경의 어디를 볼 것인가. 그림을 보는 내내 우리가 자꾸 이카로스의 다리를 찾게 되는 것 — 어쩌면 그 작은 응시의 노력 속에, 농부가 되지 않을 실낱같은 가능성이 있다.
덧붙이자면, 이 그림의 정체 자체가 하나의 아이러니다. 오랫동안 브뤼헐의 진품으로 여겨졌으나, 1996년의 기술 조사 이후 학계는 이것을 브뤼헐이 그린 잃어버린 원작(1558년경 추정)을 후대의 누군가가 충실히 베낀 '좋은 모사본'으로 본다(브뤼셀 왕립미술관 소장). 원작자는 사라지고 이름 없는 손이 남긴 그림. 정작 이 걸작의 진짜 저자마저, 이카로스처럼 역사의 물거품 속으로 조용히 가라앉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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