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상처에서 태어났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따르면,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해 그 살점을 바다에 던졌을 때, 물거품이 일고 그 거품 속에서 한 여신이 솟아올랐다. 아프로디테, 로마 이름으로 비너스다. 이름부터가 '거품(aphros)에서 나온 자'라는 뜻이다. 폭력의 잔해가 바다에 닿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태어난 것이다. 신화는 처음부터 하나의 역설을 품고 있었다. 아름다움의 근원은 낙원이 아니라 파괴였다.
보티첼리가 1484년 무렵 그린 이 그림은 바로 그 순간을 붙잡는다. 조가비 위에 선 비너스가 막 뭍에 닿으려 한다. 왼쪽에서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연인을 껴안은 채 입김을 불어 그녀를 해변으로 밀어 보내고, 오른쪽에서는 계절의 여신 호라이 중 하나가 꽃무늬 망토를 들고 그녀를 맞이한다. 화면은 고요하지만, 실은 탄생의 첫 호흡을 그린 정지 화면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 하나. 이 여신은 방금 태어났다는데, 표정이 조금도 기쁘지 않다. 오히려 어딘가 아득하고, 살짝 우울하기까지 하다. 몸은 해변으로 실려 오는데 시선은 다른 곳을 헤맨다. 목은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할 만큼 길고, 왼쪽 어깨는 자연스럽지 않게 흘러내렸다. 보티첼리는 사실적인 육체를 그리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그리려 한 것은 살덩어리로서의 여자가 아니라, 하나의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그 관념을 이해하려면 그림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15세기 후반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저택에는 유럽에서 가장 앞선 지적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른바 '플라톤 아카데미'다. 그 중심에 마르실리오 피치노라는 사상가가 있었다. 그는 플라톤의 저작 전체를 라틴어로 옮긴 인물이자, 고대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하나로 녹여 보려 한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대표자였다.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은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 열세 살에 고아가 되어 피치노와 시인 폴리치아노에게서 직접 배운 청년이었다(Uffizi Galleries 해설). 즉 이 그림은 당대 최고의 철학 살롱 한복판에서 태어난 셈이다.
신플라톤주의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아름다움은 신에게로 오르는 사다리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미 그 사다리를 그려 보였다. 사람은 처음엔 한 사람의 아름다운 몸에 반하지만, 점점 아름다운 몸 전체로, 아름다운 마음으로, 아름다운 제도와 지식으로 눈을 옮기다가, 마침내 '아름다움 그 자체'에 이른다는 것이다. 피치노는 이 사다리를 사랑의 여정으로 다시 썼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반하는 그 떨림은, 사실 신적인 것을 향한 영혼의 그리움이 잠시 얼굴을 바꾸어 나타난 것이다.
이 관점에서 비너스는 둘로 나뉜다. 피치노는 두 명의 비너스를 말했다. 하나는 '천상의 비너스(Venus Coelestis)', 순수하고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다른 하나는 '지상의 비너스(Venus Vulgaris)', 육체의 사랑과 생식을 맡는 여신이다. 보티첼리가 그린, 벌거벗었으되 조금도 관능적이지 않고 오히려 명상에 잠긴 듯한 이 비너스는 분명 앞쪽, 천상의 비너스다. 그녀의 나체는 유혹이 아니라 순수함의 표지다. 감출 것이 없는 자, 진리처럼 벌거벗은 자인 것이다.
여기서 그림 속 작은 장치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오른쪽 여신이 내미는 붉은 망토에는 데이지와 앵초가 수놓여 있다. 이것은 곧 육체의 옷, 즉 순수한 영혼이 지상에 내려와 걸치게 될 물질의 세계를 뜻한다. 비너스가 아직 그 옷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녀는 지금 정신에서 물질로 건너오는 문턱, 바로 그 경계에 서 있다. 왼쪽 제피로스의 입김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숨(pneuma)', 곧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신적 기운의 이미지다. 그림 전체가 '보이지 않는 것이 어떻게 보이는 세계로 들어오는가'라는 하나의 철학적 물음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당대의 시인 폴리치아노가 쓴 시 「조스트라(Giostra)」에도 거의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조가비를 타고 온 여신, 그녀를 맞는 계절의 여신들. 보티첼리가 이 시를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이 미술사의 오랜 정설이다(Uffizi Galleries 해설). 게다가 이 도상 자체가 고대의 유명한 그림을 되살린 것이다. 전설적인 화가 아펠레스가 그렸다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비너스(Venus Anadyomene)」. 원작은 사라졌지만 그 명성은 문헌으로 전해졌고,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고대의 잃어버린 걸작을 되살린다는 자부심으로 이 주제에 매달렸다. 이 그림은 단순한 신화 삽화가 아니라, 고대를 부활시킨다는 르네상스 기획 그 자체의 선언문이었다.
이제 처음의 역설로 돌아가 보자. 아름다움은 상처에서 태어났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이 잔혹한 신화를 오히려 반겼다. 그들에게 비너스의 탄생은 이런 뜻이었다. 신적인 완전함(우라노스, 하늘)이 스스로를 깨뜨려 물질의 바다로 흩어질 때, 그 흩어짐 속에서 비로소 아름다움이 태어난다. 완전한 것이 부서져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조금 멀게 느껴진다면 이렇게 바꿔 볼 수 있다. 아무 흠 없는 사람에게 우리는 좀처럼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오히려 어딘가 결핍이 있고,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얼굴에 마음이 기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방금 태어났으면서도 우울해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완전한 하늘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 근원을 향한 그리움을 태생부터 안고 있는 존재다.
그래서 이 그림은 조용히 우리를 겨냥한다. 누군가에게 반해 본 적 있다면,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이유 모를 슬픔을 느껴 본 적 있다면, 피치노는 그것이 당신 영혼이 고향을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목적지가 아니라 이정표다. 그것은 늘 자기 너머의 무언가를 가리킨다. 조가비 위의 여신이 뭍에 닿기 직전의 자세로 영원히 멈춰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도착하는 순간 사다리는 끝나 버리므로, 그녀는 영원히 '건너오는 중'이어야 한다.
500년 전 피렌체의 한 저택에서, 거품에서 태어난 여신은 그렇게 철학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우피치 미술관의 벽에서, 여전히 뭍에 닿지 못한 채, 우리를 자기 너머로 밀어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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