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천지창조」(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1512) 중 「아담의 창조」(La Creazione di Adamo)
두 손가락은 끝내 닿지 않는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 한복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이 장면을 사람들은 흔히 "신과 인간이 손을 맞대는 그림"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림을 보면, 신의 오른손 검지와 아담의 왼손 검지는 붙어 있지 않다. 손톱 하나쯤의 틈이 남아 있다. 미켈란젤로는 접촉의 순간이 아니라 접촉 직전의 순간을 그렸다. 이 미세한 간극이야말로 이 그림 전체를 떠받치는 철학적 심장이다. 왜 그는 하필 '아직 닿지 않은' 찰나를 택했을까.
신이 인간처럼 생겼다는 사건
먼저 이 그림이 얼마나 이상한 그림인지부터 짚어야 한다. 중세 천 년 동안 신은 함부로 그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려지더라도 손 하나, 빛 한 줄기, 혹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선으로 암시되었다. 신을 인간의 얼굴과 근육을 가진 노인으로, 그것도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허공을 가르는 역동적인 신체로 그린다는 것은 대담한 사건이었다.
이 대담함의 배경에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 1장 27절은 "신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적는다. 중세는 이 구절의 '형상'을 영혼의 닮음으로 조심스럽게 해석했지만, 르네상스는 그것을 정면으로 뒤집어 읽었다. 인간이 신을 닮았다면, 거꾸로 신을 상상할 때 우리가 아는 가장 완전한 형상 — 곧 인간의 몸 — 을 빌려도 되지 않는가. 미켈란젤로의 신은 그래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것은 신성모독이 아니라 인간 존엄에 대한 선언이었다.
같은 시대 피렌체에서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1486)에서 신의 입을 빌려 아담에게 이렇게 말하게 한다. "나는 너에게 고정된 자리도, 고유한 얼굴도, 특별한 재능도 주지 않았다. 다른 피조물의 본성은 정해진 법칙 안에 갇혀 있으나, 너는 스스로 네 본성을 빚어라." 인간은 완성된 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미완의 존재라는 것. 미켈란젤로의 아담을 이해하는 열쇠가 여기 있다.
아담의 나른함, 신의 질주
그림을 다시 보자. 왼쪽의 아담은 대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몸은 이미 완성되었으나 아직 힘이 없다. 팔은 무겁게 늘어지고, 검지는 마지못해 들린 듯 축 처져 있다. 살아 있으되 아직 온전히 살아 있지 않은 몸. 반대로 오른쪽의 신은 천사들의 무리에 감싸인 채 맹렬한 속도로 아담을 향해 돌진한다. 그의 팔은 곧게 뻗어 있고, 검지는 의지로 팽팽하다.
한쪽은 수동적이고 한쪽은 능동적이다. 한쪽은 받는 자, 한쪽은 주는 자. 미켈란젤로는 창조를 '흙을 빚는 노동'이 아니라 '건너가는 힘'으로 그렸다. 신에게서 아담에게로 무언가가 건너가려는 참이다. 그런데 그 무언가는 대체 무엇인가. 단순한 목숨이라면, 이미 아담의 몸은 완벽하게 조각되어 있다. 건너가야 할 것은 생물학적 숨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다.
망토 속의 뇌
1990년, 의사 프랭크 메시버거는 미국의사협회지(JAMA)에 짧지만 파문을 일으킨 논문을 실었다(Meshberger, "An Interpretation of Michelangelo's Creation of Adam Based on Neuroanatomy," JAMA, 1990). 신과 천사들을 감싼 붉은 망토의 윤곽이 인간 뇌의 단면도와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대뇌의 주름, 뇌간, 시신경, 뇌하수체에 해당하는 위치까지 형태가 맞아떨어진다. 미켈란젤로는 젊은 시절 시신을 해부하며 인체를 연구한 사람이다. 그가 뇌의 구조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 해석이 옳다면, 신이 아담에게 건네려는 것은 목숨이 아니라 지성이다. 이성, 사유, 자기를 아는 능력. 신은 아담에게 심장을 뛰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불어넣으려 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살아 있음 그 자체가 아니라 생각할 수 있음이라는 것 — 이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방법서설』, 1637)를 한 세기 앞서 그림으로 예언한 셈이다. 물론 이 뇌 가설은 확정된 정설이 아니라 하나의 유력한 해석이다. 그러나 설령 미켈란젤로가 뇌를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림이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여기서 창조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플라톤의 그림자, 그리고 다시 그 간극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에서 메디치가의 후원 아래 성장했고, 그 집에는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이끄는 플라톤 아카데미가 있었다. 여기서 되살아난 신플라톤주의는 이렇게 가르쳤다. 세계는 신적인 '일자(一者)'로부터 넘쳐흐르며(유출), 인간의 영혼은 본래 그 근원에서 떨어져 나온 불꽃이라고(플로티노스, 『엔네아데스』). 육체는 영혼이 잠시 머무는 감옥이고, 참된 삶이란 그 근원을 향해 다시 상승하는 일이다.
이 관점에서 「아담의 창조」를 보면 손가락의 간극이 새롭게 읽힌다. 신의 불꽃은 인간에게 건너왔으되, 완전히 하나로 녹아들지는 않았다. 인간은 신적인 것을 품고 있지만 신은 아니다. 그래서 늘 결핍을 느끼고, 늘 근원을 향해 손을 뻗는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그 틈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다. 채워졌다면 갈망은 사라졌을 것이고, 완전히 끊겼다면 갈망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신과 짐승 사이, 딱 그 손톱만 한 거리에 걸려 있는 존재다.
미켈란젤로 자신이 이 '건너감'과 '미완성'의 사유를 누구보다 깊이 앓았다. 그는 조각이란 대리석 덩어리 속에 이미 갇혀 있는 형상을 끌어내는 일이라 믿었고, 자신의 소네트에서 "최고의 예술가라도 대리석 하나가 그 안에 품지 않은 관념은 결코 만들지 못한다"고 노래했다. 형상은 이미 거기 있다. 예술가는 다만 불필요한 돌을 걷어내 그것을 해방시킬 뿐이다. 신이 아담을 창조하는 장면과 조각가가 돌에서 인간을 끌어내는 장면은 그에게 같은 사건이었다. 창조란 없던 것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잠재된 것을 불러 깨우는 일이다.
손을 뻗은 채로 산다는 것
그러니 이 그림은 완결의 그림이 아니라 시작의 그림이다. 우리는 종종 인생을 어떤 완성된 상태 — 자아를 다 찾은 나, 목표를 다 이룬 나 — 로 상상한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그린 인간은 처음부터 완성되지 않은 채로, 무언가를 향해 팔을 뻗은 자세로 태어난다. 취업 준비생이 아직 오지 않은 합격 통보를 향해, 연인이 아직 확인되지 않은 마음을 향해, 우리는 늘 그 손톱만 한 간극 너머로 손을 내민다. 닿지 않아서 불안하지만, 닿지 않아서 계속 뻗는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 손가락이 우리에게 건네는 전언은 어쩌면 이것이다. 인간이란, 끝내 다 채워지지 않는 간극을 안고 그럼에도 손을 뻗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다. 완성이 아니라 뻗음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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