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같지 않은 집, 거리 같지 않은 거리
밤도 낮도 아닌 어떤 시간이 있다. 그림자가 지나치게 길고, 햇빛은 지나치게 노랗고, 건물은 지나치게 고요한 그 시간. 조르조 데 키리코가 1914년에 그린 《거리의 신비와 우울》은 바로 그 시간 속에 존재한다.
캔버스 속 풍경은 얼핏 평범해 보인다. 아치형 회랑이 늘어선 이탈리아식 광장, 길게 뻗은 그림자,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가는 소녀. 그런데 보면 볼수록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소녀의 그림자는 너무 길다. 회랑 너머로 드리운 또 다른 그림자는 분명히 누군가의 것인데, 그 주인은 어디에도 없다. 광장은 텅 비어 있고, 화물차의 문은 기이하게 열려 있다. 아름다운 풍경인데, 왜 이렇게 불안한가.
이 불안을 철학의 언어로 설명하려 했던 두 사람이 있다. 하이데거와 프로이트다.
낯섦(Unheimlichkeit): 집에 있으면서 집에 없는 느낌
독일어 'Unheimlichkeit'는 영어로 'uncanniness', 한국어로는 보통 '낯섦' 혹은 '섬뜩함'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원부터 봐야 한다. 'Heim'은 독일어로 '집(home)'이다. 'heimlich'는 '집 같은, 편안한, 익숙한'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unheimlich'는 글자 그대로 '집 같지 않은', 즉 '편안하지 않은, 익숙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하이데거는 1927년 출간한 주저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이 개념을 실존적 불안의 핵심으로 끌어들인다. 그에 따르면 인간(현존재, Dasein)은 보통 일상의 관성 속에 편안하게 잠겨 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회사에 가고, 친구를 만나는 루틴 속에서 우리는 세계가 친숙하고, 자신이 어디쯤 서 있는지 안다고 느낀다. 하이데거는 이 상태를 '집에 있음(Bei-sich-sein)'이라 부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친숙함이 깨진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어디선가 문득 '아, 나는 왜 여기 있지? 이게 다 뭐지?'라는 느낌이 치고 올라올 때가 있다. 하이데거는 이것이 불안(Angst)이며, 이 불안의 본질이 바로 Unheimlichkeit라고 말한다. 세계가 갑자기 낯설어지고, 자신이 그 세계 속에 '내던져진(geworfen)' 존재임을 직감하는 순간이다.
《거리의 신비와 우울》은 이 순간을 회화로 구현한 것처럼 보인다. 화면 속 거리는 분명히 거리다. 건물이 있고, 아치가 있고, 바닥이 있다. 그런데 인간이 없다. 소녀 하나가 있지만 그 소녀는 너무 작고, 너무 혼자이고,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어서 오히려 공허함을 강조한다. 이 공간은 사람이 살 법한 공간인데,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친숙한 형식 안에 낯선 내용이 담겨 있다. 그것이 불안이다.
프로이트의 '두려운 낯섦': 억압된 것의 귀환
프로이트는 1919년 발표한 논문 「두려운 낯섦(Das Unheimliche)」에서 하이데거와는 전혀 다른 각도로 이 개념에 접근한다. 프로이트 역시 어원에서 출발한다. 그는 'heimlich'라는 단어가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는 '친숙하고 편안한'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숨겨진, 비밀스러운'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heimlich'는 어느 순간 그 반대말인 'unheimlich'와 만나버린다. 감춰진 것은 언제나 낯선 것이 될 수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두려운 낯섦은 본래 낯선 것에서 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래전에 억압되어 잊혔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시 돌아올 때 생기는 감각이다. 어린 시절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 예를 들어 인형이 살아 움직일 수 있다거나,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거나 하는 생각들을 어른이 되면서 억압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그것이 다시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이 낯선 것이 아니라 낯설어진 친숙한 것임을 어렴풋이 알아보면서 섬뜩함을 느낀다.
《거리의 신비와 우울》에서 화면 밖 그림자의 주인이 없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 우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상상을 자연스럽게 했다. 어른이 된 뒤로는 그런 상상을 억눌렀다. 그런데 이 그림은 그 억압된 상상을 다시 소환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저 그림자의 주인이라면? 그것이 소녀에게 다가가고 있다면? 그 순간 그림은 단순한 이탈리아 풍경화가 아니라 심층 심리의 표면이 된다.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 시간의 탈구
데 키리코 스스로도 이 그림들의 원천을 철학에서 찾았다. 그는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탐독했고, 특히 니체의 '영원회귀'와 '시간의 정지' 개념에 매료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창시한 '형이상학적 회화(Pittura Metafisica)'는 눈에 보이는 사물 너머의 세계, 즉 일상적 시공간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를 포착하려는 시도였다.
그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키리코의 가장 강력한 도구는 그림자다. 《거리의 신비와 우울》에서 그림자들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같은 화면 안에서 광원이 일치하지 않는다. 소녀의 그림자와 회랑의 그림자는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다. 의도적인 시간의 탈구다. 마치 다른 시간대에 찍힌 사진들을 한 장면에 합성해놓은 것처럼, 이 그림 속에는 단일한 현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일상적 시간성(Zeitlichkeit)이 붕괴된 공간이다. 우리가 시간을 '과거-현재-미래'의 연속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세계에 익숙하게 정박해 있기 때문인데, 데 키리코의 광장에서는 그 정박이 풀려 있다. 그 결과 거리는 거리이되 어떤 시간의 거리인지 알 수 없고, 소녀는 달리고 있되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 알 수 없다.
불안은 왜 아름다운가
철학자들의 분석을 다 제쳐두고 가장 순수한 질문 하나로 돌아가 보자. 이 그림은 왜 불안하면서 동시에 아름다운가.
하이데거에게 불안은 회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불안은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실존을 대면하는 계기다. 일상의 관성에 잠겨 있던 사람이 불안 속에서 비로소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이고, 나는 왜 여기 있는가'를 묻기 시작한다. 불안은 진지함의 출발점이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은 그저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다가 죽는다.
프로이트에게도 억압된 것의 귀환은 단순히 병리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억눌러왔는지, 무엇을 두려워해왔는지를 드러내 주는 거울이다. 두려운 낯섦의 감각은 불쾌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강력한 계기가 된다.
데 키리코의 그림이 불안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바로 이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보는 사람을 일상의 안락함 밖으로 밀어내면서, 동시에 그 밖에 있는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게 만든다.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가는 소녀처럼, 우리도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다. 그 도착지가 어디인지 모른 채.
에필로그: 우리는 모두 키리코의 광장에 산다
스마트폰 화면을 끄고 나서 갑자기 밀려오는 공허감. 익숙한 길을 걷다가 문득 '내가 왜 여기 있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무 이유 없이 새벽에 눈이 떠져서 천장을 바라보는 그 시간. 이것들이 모두 데 키리코의 광장이다.
하이데거는 이 낯섦을 도망치지 말고 직면하라고 권한다. 그 직면 속에서만 우리는 자신의 유한성을 알고, 그 유한성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것과 화해하라고 권한다. 우리가 낯설다고 밀어낸 것들 속에 우리 자신의 일부가 있기 때문이다.
데 키리코는 1910년대에 이 그림들을 그리면서, 철학을 공부한 적 없는 사람에게도 이 진실을 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빈 광장, 긴 그림자, 혼자 달리는 소녀 하나면 충분했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 낯선 거리를 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 낯섦이야말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