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기 싫어한다. 특히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러나 클림트는 캔버스 한가운데 죽음을 세워두고, 그 옆에 삶을 밀착시켰다. 두 존재는 등을 돌리지 않는다. 죽음은 삶을 바라보고, 삶은 죽음을 외면한 채 서로를 껴안고 있다. 이 불편한 동거가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죽음과 삶(Tod und Leben)》이다.
1. 캔버스 안의 두 세계
1910년에 초안이 그려지고 1915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현재 빈의 레오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화면은 크게 두 덩어리로 나뉜다.
왼쪽에는 죽음이 서 있다. 해골을 형상화한 얼굴, 해골 문양과 십자가 문양이 빼곡히 새겨진 어두운 로브를 걸친 이 존재는 마치 승려처럼 엄숙하다. 무표정하지 않다. 그는 삶 쪽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그 눈빛은 위협적이라기보다는 담담하고 기다리는 듯하다.
오른쪽에는 삶이 있다. 남녀노소 여러 인물들이 뒤엉켜 잠든 듯, 혹은 황홀경에 빠진 듯 서로를 껴안고 있다. 클림트 특유의 황금빛, 꽃 문양, 화려한 색채가 이 군상을 감싸고 있다. 눈을 감은 얼굴들은 평온하고, 어느 죽음의 냄새도 맡지 못한다는 듯이. 그들은 죽음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화면은 답하지 않는다.
이 대비는 단순한 '삶 대 죽음'의 도식이 아니다. 클림트는 이 두 존재를 대립시키면서도 분리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에게 손을 뻗지 않는다. 삶은 죽음을 피해 달아나지 않는다. 그저 나란히 존재한다. 바로 이 '공존'의 구도가 이 작품의 철학적 핵심이다.
2. 쇼펜하우어: 의지는 살고 싶어하지만, 개체는 죽어야 한다
클림트가 살았던 19세기 말 빈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지식인 사회에 깊이 침투해 있던 시기였다. 리하르트 바그너와 니체를 거쳐 세기말 예술가들 사이에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하나의 지적 패션이자 진지한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졌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8)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세계의 본질은 '의지(Wille)'다. 이 의지는 맹목적이고, 목적 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실현하려 한다.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모두 이 맹목적 의지의 표현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의지는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이 깃드는 개별 존재들, 즉 우리 각자는 죽는다. 의지는 불멸이지만, 의지를 담는 그릇인 개체는 필멸이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비극의 구조다.
클림트의 그림에서 삶의 군상이 서로를 끌어안고 눈을 감은 채 황홀경에 빠져 있는 모습은 바로 이 맹목적 의지의 시각화다. 그들은 살고 싶은 욕망, 연결되고 싶은 욕구, 관계와 쾌락에 대한 집착 속에서 완전히 몰입해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죽음이 서 있다. 쇼펜하우어의 시각에서 보면, 저 군상의 황홀경은 의지의 자기기만이다. 살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이 필연적인 소멸이라는 진실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고통으로부터의 탈출로 예술을 제시했다. 예술, 특히 음악은 의지로부터 잠시 해방될 수 있는 통로라고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클림트의 이 그림 자체가 그 탈출구다. 죽음을 직시하되, 그것을 아름다움 속에 담아냄으로써, 우리는 공포가 아닌 성찰로 죽음을 만나게 된다.
3. 프로이트: 에로스와 타나토스, 두 충동의 영원한 전쟁
클림트가 이 그림을 완성하던 1915년은 프로이트가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둘 다 같은 도시 빈에 살았고, 같은 지적 공기를 마셨다. 프로이트가 1920년 『쾌락 원칙을 넘어서(Jenseits des Lustprinzips)』에서 정식화한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의 개념은 클림트의 그림을 읽는 탁월한 렌즈가 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 깊숙한 곳에 두 가지 근본 충동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에로스, 즉 생의 충동이다. 이것은 단순히 성적 욕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연결하고, 통합하고, 하나로 묶으려는 힘이다. 사랑, 유대, 번식, 창조 모두 에로스의 표현이다. 두 번째는 타나토스, 즉 죽음 충동이다. 이것은 유기체가 긴장을 해소하고 무기물 상태, 즉 비존재로 돌아가려는 경향이다. 공격성, 자기파괴, 정지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이 여기에 속한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충동이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혼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삶은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끊임없이 교차하고 싸우는 무대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 속에 이미 상실에 대한 예감이 깃들어 있다. 극도의 쾌락은 작은 죽음(la petite mort)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장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 죽음과 가장 가까운 순간이기도 하다는 역설이다.
클림트의 화면을 다시 보자. 오른쪽 삶의 군상은 에로스의 집약이다.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살을 맞대고, 황홀하게 엉켜 있다. 이것은 생의 충동, 연결에 대한 욕구의 시각적 표현이다. 그리고 왼쪽의 죽음은 타나토스의 인격화다. 죽음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삶의 군상 바로 옆에 항상 있었다는 것을 클림트는 화면 구성으로 말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시각에서 이 그림은 무의식의 지형도다. 의식의 표면에서는 삶이 황홀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그 무의식의 심층에는 타나토스, 즉 귀환 본능이 조용히 대기하고 있다.
4. 클림트는 왜 죽음을 아름답게 그렸는가
이 그림의 가장 흥미로운 특징 중 하나는 죽음이 추하지 않다는 점이다. 클림트의 죽음은 으스스하지만, 장식적이다. 해골 문양조차 그의 손을 거치면 패턴이 되어버린다. 왜 클림트는 죽음을 미화했을까.
이것은 단순한 탐미주의가 아니다. 19세기 말 빈을 풍미하던 '죽음의 문화(Todeskultur)'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세계관을 담고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 치하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서서히 붕괴하고 있었다. 클림트와 동시대 빈의 지식인들은 이 쇠락을 피부로 느끼면서, 삶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함께 응시하는 미학을 발전시켰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1927)에서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인간은 단순히 죽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이미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존재다. 그리고 이 사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진정한 실존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죽음을 외면하면 '세인(das Man)', 즉 군중 속에 흩어져 자기를 잃어버린 비본래적 삶을 살게 된다.
클림트의 그림에서 삶의 군상은 정확히 이 '비본래적' 상태에 있다. 그들은 눈을 감고 서로에게 기대어 있다. 황홀하지만, 죽음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은 그 바로 옆에서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하이데거적으로 읽으면, 이 그림은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눈을 감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을 직시하며 살고 있는가.
5. 포옹의 역설, 혹은 삶이 가장 빛나는 순간
클림트의 작품 세계에서 《죽음과 삶》은 《키스(Der Kuss)》(1907-1908)와 함께 읽어야 한다. 《키스》에서 두 연인은 황금빛 망토 속에서 완전히 하나가 된다. 그것은 에로스의 절정이다. 《죽음과 삶》에서 군상의 포옹은 그 에로스 다음에 오는 것, 혹은 그 에로스와 항상 공존하는 것을 보여준다.
프로이트가 말했듯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분리될 수 없다. 가장 강렬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유한함을 직감한다. 첫사랑의 황홀감 뒤에 찾아오는 이유 없는 슬픔, 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느끼는 경이와 불안의 혼합, 오랜 친구와의 재회 다음 날 밀려오는 허전함. 이것들은 모두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동시에 작동하는 순간들이다.
클림트의 삶의 군상이 아름답게 포옹하는 장면은 그래서 슬프다. 그들이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알면서도 눈을 감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선택 자체가 삶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삶은 고통이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는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죽음 충동이 내재해 있지만, 에로스는 여전히 연결을 만들어낸다.
캔버스의 왼쪽과 오른쪽은 사실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화면 안에 있다. 그것이 클림트의 메시지다. 죽음은 삶의 외부에 있는 적이 아니라, 삶의 조건이자 그림자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의식할 때, 오늘 이 포옹은 더 뜨거워질 수 있다.
6. 오늘 우리에게 이 그림이 말하는 것
이 그림이 그려진 지 100여 년이 지났지만, 메시지는 놀랍도록 현재적이다. 현대인은 죽음을 더욱 잘 숨긴다. 병원의 하얀 커튼 뒤로, 요양원의 조용한 복도로, SNS의 필터 뒤로. 우리는 늙음과 죽음을 일상에서 격리시키는 데 점점 능숙해졌다.
그러나 클림트의 그림은 말한다. 죽음은 저 왼쪽에 있지 않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당신 곁에,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의 바로 옆에 서 있다고.
쇼펜하우어는 삶이 고통이라고 했지만, 그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프로이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충돌하는 인간의 내면을 직시하라고 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외면하지 말고 본래적 실존으로 나아가라고 했다.
클림트는 이 모든 것을 말 대신 색채와 형태로 말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포옹과, 그 옆에 조용히 서 있는 해골.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오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포옹, 함께 먹는 식사, 나누는 눈빛. 그 모든 것이 저 캔버스 안의 군상처럼 아름답고, 유한하고, 소중하다.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지금 이 순간을 더 선명하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다.
클림트의 죽음은 협박하지 않는다. 다만, 서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