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x철학
  • 《올랭피아 Olympia》
  • 보여지는 몸과 되받아치는 시선
  • 에두아르 마네

  • [1] 1865년, 그림 앞에 경비병이 섰다

    1865년 봄 파리 살롱전. 한 그림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팡이와 양산으로 캔버스를 찌르고 후려치려는 관객들을 막기 위해, 주최 측은 결국 그림을 전시장 가장 높은 구석, 사람 손이 닿지 않는 자리로 옮겨 걸어야 했다. 한 여인의 누드화 한 점이 일으킨 소동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분노의 성격이다. 19세기 살롱전의 벽은 벌거벗은 여신들로 가득했다. 비너스가, 님프가, 목욕하는 여인들이 매끄러운 살결을 드러낸 채 수백 점씩 걸려 있었고 누구도 그것을 외설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마네의 이 여인은 달랐다. 같은 누드인데, 사람들은 모욕당했다고 느꼈다.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답을 찾는 일은 미술사의 문제이자 동시에 철학의 문제다. 그것은 "본다는 것"과 "보여진다는 것" 사이의 권력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2] 여신이 사라진 자리

    마네는 숨기지 않았다. 《올랭피아》의 구도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거의 그대로 따왔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여인, 한 손으로 음부를 가린 자세, 발치의 동물, 배경의 시중드는 인물. 르네상스의 거장이 그린 사랑의 여신, 그 신성한 도상을 마네는 통째로 빌려왔다. 그리고 그 안의 내용물을 전부 갈아 끼웠다.

    티치아노의 발치에는 충실함을 상징하는 잠든 강아지가 있었다. 마네는 그 자리에 등을 곧추세운 검은 고양이를 놓았다. 길들여지지 않은 것, 밤과 성(性)의 은유다. 여신의 부드러운 시선은 정면을 똑바로 쏘아보는 차갑고 무심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머리에는 난초 한 송이, 목에는 검은 리본, 발에는 슬리퍼 한 짝이 벗겨지려 한다. 등 뒤에서는 흑인 하녀가 꽃다발을 안고 들어온다 ― 어떤 남자 손님이 보낸 선물이다.

    결정적인 것은 그 손이다. 비너스의 손이 수줍게 몸을 가리는 시늉이었다면, 올랭피아의 손은 단단하게 음부를 틀어막고 있다. 가리는 척이 아니라, 가격을 치르기 전에는 안 된다는 듯한 차단이다. 게다가 '올랭피아'라는 이름 자체가 당대 파리에서 고급 매춘부를 연상시키는 흔한 예명이었다. 관객들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것은 여신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젯밤 다녀왔을지도 모를, 살아 있는 동시대의 매춘부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3] 벌거벗은 몸과 누드 ―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영국의 비평가 존 버거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에서 미술사를 뒤흔드는 구별 하나를 제안했다. 벌거벗음(naked)과 누드(nude)는 다르다는 것이다. 벌거벗는다는 것은 그냥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다. 반면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해 배치된 몸, 즉 하나의 형식이자 전시물이다. 버거에 따르면 유럽 회화 속 여성 누드는 거의 언제나 그림 밖의 남성 관람자를 위해 자세를 잡고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를 위해 진열되어 있다.

    버거는 이를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남자는 행동하고, 여자는 나타난다. 남자는 세계에 무언가를 한다. 여자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보여지는 대상으로 존재한다. 거울 앞에서 옷을 갈아입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우리는 거울 속에서 '나'를 보는 동시에, 그 '나'를 바라볼 누군가의 시선을 미리 상상하며 매무새를 고친다. 누드화 속 여신들이 손에 거울을 든 채 그려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은 보기 좋은 구경거리"라는 메시지를, 여인 스스로의 입을 빌려 말하게 하는 장치였다.

    19세기 살롱의 비너스들이 외설로 처벌받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그녀들은 신화라는 알리바이를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보여지는 일에 순순히 협조했다. 눈을 감았거나, 시선을 돌렸거나, 황홀경에 빠져 자기가 구경거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척해 주었다. 관객은 안전하게, 들키지 않고, 마음껏 훔쳐볼 수 있었다.


    [4] 되받아치는 시선 ― 사르트르의 '응시'

    올랭피아는 그 암묵적 계약을 깨뜨렸다. 그녀는 눈을 감지 않는다. 황홀경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녀는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바로 그 사실을 관객에게 되쏘아 보낸다. 훔쳐보려던 시선이 정면에서 붙들린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 L'Être et le Néant》에서 '타인의 응시(le regard)'를 분석하며 유명한 예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복도에서 열쇠 구멍으로 방 안을 엿보고 있다고 하자. 그 순간 그는 오롯이 보는 주체다. 세계는 그의 시선 아래 펼쳐진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그를 보고 있다. 그 찰나, 엿보던 자는 한순간에 '엿보는 추한 자'라는 하나의 대상으로 굳어진다. 그를 사로잡는 감정이 바로 수치심이다. 사르트르에게 수치심이란 타인의 시선 앞에서 내가 하나의 사물로 응고되었음을 깨닫는 체험이다.

    올랭피아의 눈은 바로 그 등 뒤의 발소리다. 관객은 그녀를 구경하러 왔다가, 그녀의 시선에 붙들려 거꾸로 구경거리가 된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 한 여자의 벗은 몸을 값을 매기며 훑고 있다는 사실 ― 를 들켜 버린 것이다. 1865년 관객들이 느낀 분노의 정체는 사실 수치심이었다. 그들은 모욕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의 천박함을 그림 앞에서 들켰던 것이다. 지팡이를 휘두른 손은, 자신을 응고시킨 그 시선을 부수고 다시 보는 주체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발버둥이었다.

    보부아르는 이 구도에 성(性)의 좌표를 그어 넣는다. 《제2의 성 Le Deuxième Sexe》에서 그녀는 여성이 역사적으로 '타자(the Other)'의 자리, 즉 응시받는 대상의 자리에 고정되어 왔다고 보았다. 주체는 늘 남성이었고 여성은 그 시선이 향하는 풍경이었다. 올랭피아가 위험했던 까닭은, 대상의 자리에 놓인 여자가 시선을 되받아치며 스스로 하나의 주체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5] 침대 위의 상품 ― 매춘부라는 근대의 알레고리

    그러나 올랭피아의 시선은 단지 남녀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녀의 직업이 매춘부라는 사실이 결정적이다. 미술사가 T. J. 클라크는 《근대적 삶의 회화 The Painting of Modern Life》에서, 마네가 그린 것은 한 여자의 몸이 아니라 1860년대 파리라는 도시의 계급적 불안 그 자체였다고 분석했다. 산업화된 대도시 파리에서 매춘은 익명의 거대한 시장이 되어 있었고, 점잖은 부르주아 신사들은 그 시장의 단골 고객이면서도 그 사실을 결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올랭피아는 그 침묵의 거래를 백주 대낮의 전시장 벽에 못 박아 버렸다.

    발터 벤야민은 이 매춘부라는 형상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읽어 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Das Passagen-Werk》에서 그는 매춘부를 가리켜 "파는 자와 상품이 한 몸에 있는 존재"라고 했다. 보통의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만 몸 자체는 자기 것으로 남는다. 그러나 매춘부는 상품과 판매자가 분리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진열하고, 흥정하고, 판매한다. 그래서 벤야민에게 매춘부는 모든 것이 사고 팔리는 상품으로 변해 버린 근대 세계의 압축판이자 알레고리였다.

    올랭피아의 그 단단한 손, 값을 치르기 전에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한 그 차단의 몸짓이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그녀는 자신이 상품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앎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거래의 조건을 제시하는 냉정한 사업가의 눈으로 고객을 응시한다. 보여지는 몸이되, 그 몸의 거래를 주관하는 주체. 여기서 응시의 역전은 성의 권력을 넘어 시장의 권력으로까지 번진다. 마네가 다룬 적게 그려진 주제, 곧 노동과 계급의 문제가 침대 위 한 여자의 눈빛 속에 응축되어 있는 셈이다.


    [6] 그림이 그림임을 말할 때 ― 바타유와 근대 회화의 탄생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는 만년에 마네론(《마네 Manet》)을 쓰며 이 그림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그가 보기에 《올랭피아》의 충격은 외설의 충격이 아니라 '부정(否定)'의 충격이었다. 전통 회화는 늘 무언가를 ― 신화를, 역사를, 도덕적 교훈을 ― 이야기했다. 그림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투명한 창문이어야 했다. 그런데 마네는 그 이야기를 지워 버렸다. 올랭피아는 어떤 신화도, 어떤 교훈도 전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거기 있을 뿐이고, 무심하게 우리를 바라볼 뿐이다.

    바타유는 이 침묵, 이 의미의 공백에서 근대 회화가 태어났다고 보았다. 그림이 더 이상 바깥의 이야기를 위해 봉사하지 않고, 물감과 붓질과 색면 그 자체로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 우리가 흔히 마네를 모더니즘 회화의 출발점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정작 동시대에 마네를 변호한 거의 유일한 목소리였던 소설가 에밀 졸라는 이 점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졸라는 사람들이 그림 속 매춘부를 두고 도덕을 논하는 동안, 마네가 진짜로 보여 주려 한 것은 빛과 색의 정직한 배치일 뿐이라고 옹호했다.


    [7] 셀카는 누구를 보는가 ― 오늘의 올랭피아

    올랭피아의 시선은 박물관에 갇혀 있지 않다. 그것은 매일 우리 손바닥 위에서 반복된다.

    소셜 미디어에 올리는 셀카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사진을 찍기 전, 이미 그것을 볼 타인의 시선을 머릿속에 세팅한다. 각도를 조정하고, 표정을 고르고, 필터를 입힌다. 버거의 말이 디지털 시대에 완벽하게 부활한다. 우리는 자신을 보는 동시에, 자신을 보게 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배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여성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나타나는 자'의 자리에 올려놓는다는 점이다. 우리 각자가 자기 삶의 누드화를 그리는 화가이자 모델이다.

    벤야민의 통찰은 더욱 적나라해졌다. 인플루언서 경제 속에서 사람은 문자 그대로 "파는 자와 상품이 한 몸"이 된다. 팔로워 수가 곧 자산이고, 일상과 외모와 표정이 그대로 매물이 된다. 올랭피아가 침대 위에서 했던 일을, 지금 우리는 피드 위에서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올랭피아의 그 되받아치는 시선이 남아 있을까. 끝없이 보여지면서, 동시에 그 보여짐을 내가 주관하고 있다는 자각. 알고리즘이 나를 상품으로 진열할 때, 그 진열의 조건을 응시할 줄 아는 눈. 어쩌면 1865년의 그 무심한 시선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너는 그저 보여지고만 있는가, 아니면 보여지는 너 자신을 마주 볼 수 있는가.


    [8] 응고를 거부하는 눈

    수치심은 내가 타인의 시선 앞에서 한낱 사물로 굳어질 때 찾아온다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1865년의 관객들은 그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지팡이를 들었다. 그러나 정작 굳어지기를 거부한 쪽은 그림 속 여자였다. 그녀는 신화의 가면을 쓰기를 거부했고, 황홀경의 연기를 거부했고, 무엇보다 말없이 진열되는 사물이기를 거부했다.

    《올랭피아》가 한 세기 반이 지나도록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단지 벗은 몸의 그림이 아니라,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사이의 권력을 정면으로 뒤집어 보인 사건이다. 그리고 모두가 서로를 구경하고 서로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이 시대에, 그 차가운 눈은 여전히 우리에게 같은 것을 묻고 있다. 너는 누구의 시선으로 너를 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