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제목에 접속사 '와'가 하나 끼어 있다. 진리'와' 방법. 무심코 읽으면 두 낱말이 사이좋게 손을 잡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저 '와'가 실은 두 낱말을 갈라놓는 쐐기였음을 알게 된다.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가 예순이 되던 해에 내놓은 『진리와 방법: 철학적 해석학의 근본특징들』(Wahrheit und Methode: Grundzüge einer philosophischen Hermeneutik, 1960)은, 방법으로 붙잡을 수 없는 진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사건이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700쪽짜리 반증(反證)이다.



    '와'라는 접속사의 함정



    제목을 다시 본다. 근대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 오직 '방법'이라고 믿었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1637)에서 확실한 인식에 이르는 규칙들을 세운 이래, 참된 앎이란 올바른 절차를 밟아 검증된 앎을 뜻하게 되었다. 실험, 측정, 반복 가능성. 이 방법의 잣대를 통과해야만 '진리'라는 이름을 얻는다.


    가다머는 이 등식에 반기를 든다. 그가 묻는 것은 이렇다.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마음이 흔들릴 때, 오래된 친구의 한마디에 삶의 방향을 바꿀 때, 법조문 하나를 눈앞의 사건에 적용할 때 ― 그때 우리에게 일어난 것은 진리가 아닌가. 그런데 이 진리들 중 어느 것도 실험실의 방법으로는 검증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방법 바깥에도 진리가 있는 것이다. 제목의 '와'는 그래서 접속이 아니라 긴장이다. 가다머 자신은 훗날 이 제목이 반어적으로 읽히길 바랐다고 회고했다.



    방법이 진리를 독점할 때



    이 문제의 뿌리는 19세기에 있다. 자연과학이 눈부신 성공을 거두자, 역사학·문학·철학 같은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도 과학이 되고 싶어졌다. 딜타이(Wilhelm Dilthey)는 정신과학에 고유한 방법을 세워 그 학문적 권위를 지키려 했다. 자연은 '설명'하지만 정신은 '이해'한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딜타이의 선의를 존중하면서도 그 전제를 무너뜨린다. 이해를 '방법'으로 만들려는 순간, 이해는 이미 자연과학을 흉내 내는 이류(二流) 과학으로 쪼그라든다는 것이다. 그의 스승 하이데거는 이해란 인간이 가끔 하는 활동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라고 보았다(『존재와 시간』, 1927). 가다머는 이 통찰을 물려받아 방향을 튼다. 그가 던지는 진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올바로 이해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할 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이다. 방법론이 아니라 이해라는 사건의 존재론. 이것이 '철학적 해석학'이다.



    놀이, 주체를 삼키는 것



    책의 1부는 뜻밖에도 예술에서 출발한다. 예술 경험이야말로 방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진리의 가장 선명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다머가 꺼내 드는 열쇠말이 '놀이'(Spiel)다.


    축구에 열중한 아이를 떠올려 보라. 우리는 흔히 '내가 놀이를 한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놀이에 빠진 순간에는 오히려 놀이가 나를 이끈다. 규칙과 흐름이 나를 사로잡아 어느새 나는 놀이의 일부가 되어 있다. 가다머는 여기서 예술의 존재 방식을 읽어낸다. 관객이 작품을 '대상'으로 뜯어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펼치는 세계 안으로 관객이 빨려 들어가 함께 그 사건을 완성한다. 연극은 무대 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객석까지 삼킬 때 비로소 상연된다. 예술의 진리는 이렇게 '주체가 대상을 지배하는' 근대적 인식 구도를 깨뜨리며 일어난다.



    선입견을 위한 변호



    2부에서 가다머는 가장 도발적인 카드를 꺼낸다. '선입견'(Vorurteil)의 복권이다.


    계몽주의는 선입견을 이성의 적으로 몰았다. 편견을 걷어내고 백지 상태에서 사유를 시작하라 ― 이것이 근대의 구호였다. 가다머는 여기에 유쾌한 역습을 가한다. "선입견에 반대하는 그 태도 자체가 하나의 선입견 아닌가." 그는 Vorurteil이라는 독일어를 어원 그대로, '앞서(vor) 내리는 판단(Urteil)', 즉 '선(先)판단'으로 되살린다. 우리는 결코 백지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언어, 역사, 전통이 미리 짜 놓은 '앞선 이해'의 그물 위에서만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다.


    낯선 외국어 문장을 처음 마주할 때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이미 아는 단어들, 문맥에 대한 짐작, 세상에 대한 상식을 총동원해 '아마 이런 뜻이겠지' 하고 잠정적으로 밑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뒷문장을 읽으며 그 밑그림을 수정한다. 부분을 이해하려면 전체를 짐작해야 하고, 전체는 부분들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이 끝없는 왕복을 가다머는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scher Zirkel)이라 부른다. 이것은 논리적 오류가 아니라 이해가 작동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러니 선입견은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발판이다. 물론 그중에는 참된 선입견도 있고 우리를 오도하는 그릇된 선입견도 있다. 둘을 가르는 일은 나의 선입견을 텍스트 앞에 걸어 두고 위험에 노출시킬 때, 즉 대화 속에서만 일어난다.



    지평은 융합한다



    이 대화의 구조를 가다머는 '지평융합'(Horizontverschmelzung)이라는 아름다운 개념으로 그려낸다.


    지평(Horizon)이란 한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시야의 한계다. 나에게는 나의 지평이 있고, 2천 년 전 텍스트에는 그 시대의 지평이 있다. 낡은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순진한 사람은 '내 편견을 버리고 저자의 원래 의도로 돌아가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결코 나의 지평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갇혀 있는 것도 아니다. 지평은 고정된 벽이 아니라 걸음을 옮기면 함께 움직이는 선이다. 텍스트와 진지하게 대화하는 동안, 나의 지평과 텍스트의 지평은 어느 하나로 흡수되지 않은 채 더 큰 하나로 녹아든다. 이것이 지평융합이다. 세대가 다른 부모와 자식이 오래 부딪히며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 쪽도 완전히 상대가 되지는 않지만 처음보다 넓어진 공동의 이해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고전은 시대마다 다르게 읽히면서도 죽지 않는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가 묻어 둔 화석이 아니라, 읽는 이와 만날 때마다 새로 자라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가다머는 이 사건을 '영향사'(Wirkungsgeschichte)라 이름 붙인다. 우리는 역사를 저 멀리 놓고 관찰하는 심판관이 아니라, 이미 역사가 미친 영향의 물결 한가운데 서서 그 물살에 실려 이해한다. 이해란 근본적으로 이 영향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인 것이다.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이다



    3부에 이르러 가다머는 이 모든 논의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를 밝힌다. 언어다.


    지평이 융합하는 곳, 대화가 이루어지는 매체, 전통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통로 ― 그 모두가 언어다. 인간은 언어라는 집 안에서 세계를 만나고, 언어 밖의 순수한 세계에 맨몸으로 접근할 길은 없다. 번역가라면 누구나 안다. 한 문장을 옮기는 일이 단어를 갈아 끼우는 기계 작업이 아니라, 두 세계관을 마주 세워 협상시키는 대화라는 것을. 가다머의 유명한 명제가 여기서 울린다.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이다"(GW1, 478쪽). 이 말은 세상 모든 것이 낱말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에 이를 수 있는 모든 존재는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열린다는 뜻이다. 언어는 인간이 부리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가 함께 거주하는 터전이다.



    왜 지금 가다머인가



    가다머의 해석학은 절반의 세기를 건너 오늘 더 절실해졌다. 서로 다른 진영이 같은 뉴스를 정반대로 읽는 시대, 알고리즘이 나의 선입견만 골라 먹여 지평을 좁히는 시대, 번역기가 문장을 순식간에 옮기지만 세계관까지 옮기지는 못하는 시대다.


    가다머는 이런 시대에 두 가지를 일러 준다. 첫째, 너에게 선입견이 있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것은 네가 역사 속 존재라는 증거다. 다만 그 선입견을 타자 앞에 걸어 두고 흔들릴 각오를 하라. 둘째, 이해란 상대를 내 쪽으로 정복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지평이 더 넓은 하나로 녹아드는 사건이다. 진리는 방법으로 소유되지 않고, 대화 속에서 함께 일어난다. 방법이 진리를 독점한다고 믿는 세계에서, 가다머는 방법 너머에도 진리가 산다는 것을 조용히, 그러나 끝끝내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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