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전 6세기,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금이 강처럼 흐르던 나라의 왕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그는 아테네에서 온 현자 솔론에게 물었다. "그대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행복한 자는 누구인가?" 자기 이름이 나오리라 기대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솔론은 엉뚱하게도 이미 죽은 아테네의 평범한 시민 텔로스를 꼽았다. 자식을 잘 키우고,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명예롭게 전사한 사람. 어리둥절해하는 왕에게 솔론은 말했다. "끝을 보기 전에는 누구도 행복하다 부르지 마시오."(헤로도토스, 『역사』 1권 30~33)

    이 일화가 이상하게 들린다면, 그건 우리가 '행복'이라는 번역어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이 말한 그 단어는 '행복'과 꽤 다른 것을 가리켰다.


    단어 속에 숨은 정령


    그 단어는 '에우다이모니아(εὐδαιμονία)'다. 흔히 '행복'으로 옮기지만, 분해해 보면 뜻이 전혀 다르다.

    - eu(εὖ): '좋은', '잘'
    - daimōn(δαίμων): 다이몬, 곧 인간 곁에 깃든 신령·수호 정령

    문자 그대로 옮기면 '좋은 다이몬을 지닌 상태'다. 다이몬은 한 사람의 운명을 나눠 맡은 신적 존재를 가리켰다. 실제로 daimōn이 '나누다'를 뜻하는 동사 다이오(δαίω)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어원에는 이설도 있어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 설을 따르면 다이몬은 '몫을 나눠주는 자'이고, 에우다이모니아는 '좋은 몫을 배분받은 상태'가 된다.

    그러니 이 말의 뿌리에는 기분이나 감정이 없다. 잘 짜인 운명, 잘 굴러가는 삶 전체가 들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말릴 때 들었다는 '다이모니온'(내면의 신호)도 바로 이 다이몬에서 나온 말이다(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31d).


    '행복'이라는 번역이 흘려보낸 것


    문제는 번역이 두 번 굴절됐다는 데 있다.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가 영어 happiness로 옮겨지고, 그 happiness가 다시 한국어 '행복'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happiness의 hap은 본래 '우연', '운'을 뜻한다. happen(우연히 일어나다), perhaps(아마도)와 같은 뿌리다. '행복'이 곧 '운 좋게 일어난 좋은 기분'이라는 뉘앙스는 여기서 따라붙었다.

    한자어 '행복(幸福)'도 사정이 비슷하다.

    - 幸(행): 자원에는 학설이 갈리지만, 『설문해자』는 "길하여 흉을 면함(吉而免凶也)"으로 풀었다. 어느 풀이를 따르든 '요행', '운 좋게 화를 면함'의 그림자가 짙다.
    - 福(복): 示(제단)와 畐(가득 찬 술독)이 합쳐진 글자로, 신에게 제사 지내 받는 복을 뜻한다. 하늘이 위에서 내려주는 것이다.

    즉 '幸福'은 어원만 보면 '운 좋게(幸) 하늘이 내린 복(福)을 받은 상태'다. 바깥에서 주어지고, 운에 기대며,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 게다가 '행복'은 우리 고전어라기보다 근대 일본이 happiness의 번역어로 다듬어 정착시킨 말에 가깝다.

    문제가 보인다. 에우다이모니아의 '다이몬'이 가리키던 것과, '幸福'의 '운'이 가리키는 것은 방향이 정반대다. 한쪽은 일생에 걸쳐 잘 사는 능력의 문제이고, 다른 쪽은 외부에서 굴러떨어지는 행운의 문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못 박은 차이


    이 차이를 가장 분명하게 못 박은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에우다이모니아를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고 규정했다(1권 7장, 1098a). 핵심은 '활동(에네르게이아, ἐνέργεια)'이라는 말이다. 가만히 누리는 상태가 아니라, 잘 행위하는 것 자체가 에우다이모니아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제비 한 마리가 봄을 만들지 않는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7장, 1098a18) 하루 기분이 좋다고, 한순간 즐겁다고 그것이 에우다이모니아일 수 없다는 말이다. 이건 일생 전체에 걸쳐 펼쳐지는 활동이다. 솔론이 "끝을 보라"고 한 이유가 여기서 풀린다. 삶이 다 끝나야 그 사람이 잘 살았는지 판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를 들면 이렇다. 복권에 당첨된 순간의 들뜸은 '행복'이다. 그러나 에우다이모니아는 그 돈으로 10년 뒤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느냐의 문제다. 한 끼의 만족이 아니라, 평생 무엇을 하며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느냐. 전자는 운과 기분에 달려 있고, 후자는 매일의 실천에 달려 있다.


    '번영', 혹은 '잘 사는 일'


    그래서 현대의 윤리학자들은 에우다이모니아를 happiness 대신 'flourishing(번영·만개)'으로 옮기는 쪽을 택한다. 식물이 제 본성대로 무성하게 자라나는 모습. 인간이 자기 잠재력을 활동으로 펼쳐 활짝 피어난 상태. 이쪽이 원뜻에 훨씬 가깝다는 판단이다(이런 문제 제기의 출발점으로는 G. E. M. 앤스컴, 「현대 도덕철학」, 1958을 꼽는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친구·재산·건강 같은 외적 조건이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한다는 점은 인정했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8장). 운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운조차도, 덕에 따라 잘 행위하는 사람의 활동을 거들 때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언어는 사유의 그릇이다. 에우다이모니아를 '행복'이라 옮기는 순간, 우리는 그 말이 본래 가리키던 평생의 활동을 한순간의 기분으로 졸여버린다. 그리스인이 물은 것은 "지금 기분이 좋은가"가 아니라 "당신은 잘 살고 있는가"였다. 두 질문은 전혀 다른 삶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