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에피쿠리언(epicurean)'은 미식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좋은 와인을 고를 줄 알고, 식도락을 즐기며, 감각의 호사를 누리는 사람. 그런데 정작 그 단어의 주인은 보리빵과 물로 끼니를 때운 사람이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전하는 일화에서 에피쿠로스는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치즈 한 항아리만 보내주게. 내키는 날 잔치를 벌일 수 있도록"(『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 10권). 그에게 '잔치'란 치즈 한 조각이면 족한 것이었다.
쾌락주의자라는 이름이 붙은 철학자가, 정작 최고의 쾌락으로 꼽은 것은 더 많은 자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동요하지 않는 상태였다. 이 역설을 풀지 못하면 에피쿠로스는 영원히 '미식의 원조' 정도로 오해받는다.
빼기의 쾌락
에피쿠로스 철학의 최종 목적지는 분명 쾌락(hēdonē)이다. 그는 "쾌락이 복된 삶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못 박았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문제는 그 쾌락의 정체다. 통념은 쾌락을 '쌓는 것'으로 본다. 더 먹고, 더 사고, 더 누리면 더 행복해진다는 셈법이다. 에피쿠로스는 정반대를 말한다. 최고의 쾌락은 무언가를 더하는 데 있지 않고, 고통과 불안을 덜어낸 빈자리 그 자체에 있다.
그 빈자리의 이름이 아타락시아다.
휘저어지지 않는 마음
그리스어 아타락시아(ἀταραξία)는 '없음'을 뜻하는 접두사 a-와 '휘젓다, 동요시키다'를 뜻하는 동사 tarassō(ταράσσω)가 붙어 만들어졌다. 글자 그대로 옮기면 '휘저어지지 않음'이다. 바람이 멎어 수면에 물결이 일지 않는 상태. 실제로 그 어근에서 나온 명사 '동요(tarachē)'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에 그대로 등장한다. 에피쿠로스가 제거하려 한 것이 바로 마음의 그 물결이었다.
여기서 에피쿠로스의 핵심 구분이 나온다. 그는 쾌락을 두 종류로 나눴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생애』 10권). 하나는 '움직이는 쾌락'이다. 배고플 때 먹는 즐거움, 목마를 때 마시는 시원함처럼 결핍이 채워지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다른 하나는 '머무는 쾌락'이다.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아프지도 않은, 더는 채울 것이 없는 평온한 상태다. 몸의 평온은 아포니아(고통 없음), 마음의 평온이 곧 아타락시아다. 에피쿠로스는 단호히 후자를 위에 둔다.
왜일까. 그의 『주요 교설』 3번이 답을 준다. 쾌락의 크기는 모든 고통이 제거될 때 그 한계에 이른다. 즉 고통이 0이 되는 지점에서 쾌락은 정점을 찍고, 그 이상은 커지지 않는다. 그저 모양만 다양해질 뿐이다. 갈증을 떠올리면 쉽다. 물 한 잔으로 갈증이 풀리고 나면, 그 위에 물을 더 들이부어도 만족은 늘지 않는다. 채워야 할 것이 사라진 순간이 곧 만족의 천장이다. 그러니 행복은 자극을 무한히 쌓아 올리는 경주가 아니라, 결핍을 0으로 끌어내린 다음 그 평온을 유지하는 일이 된다.
마음을 흔드는 두 개의 공포
그렇다면 마음의 물결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에피쿠로스는 인간을 가장 깊이 휘젓는 두 공포를 지목한다. 신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먼저 신. 에피쿠로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신은 복되고 불멸하기에 인간사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주요 교설』 1번). 천둥과 역병을 신의 진노로 읽으며 떨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후대의 에피쿠로스주의자 루크레티우스는 장편 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이 두려움, 곧 미신(religio)이야말로 인간을 죄와 불행으로 몰아간 원흉이라고 노래했다.
다음은 죽음. 여기서 그 유명한 문장이 나온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을 때 우리는 없으므로"(『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피쿠로스에게 영혼은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이어서, 죽는 순간 흩어져 감각이 사라진다. 감각이 없으면 좋고 나쁨을 느낄 주체도 없다. 그러니 죽음은 경험되지 않는 사건이고, 경험되지 않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미리 끌어와 떠는 일만큼 마음을 헛되이 휘젓는 것도 없다는 이야기다.
이 처방은 훗날 네 줄로 압축되어 '네 가지 약(테트라파르마코스)'이라 불렸다.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굴된 필로데모스의 파피루스가 그 공식을 전한다. 신은 두려워할 것 없고, 죽음은 걱정할 것 없으며, 좋은 것은 얻기 쉽고, 두려운 것은 견디기 쉽다. 마음을 어지럽히던 거짓 믿음을 하나씩 뽑아내면, 남는 것이 아타락시아다.
헛된 욕망이라는 파도
공포만 마음을 흔드는 것은 아니다. 끝없는 욕망도 같은 일을 한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셋으로 나눴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먹을 것, 거처, 우정), 자연스럽지만 굳이 필요하진 않은 것(진수성찬 같은 호사), 그리고 헛된 것(명예, 부, 권력)이다. 앞의 둘은 한계가 분명해 어렵지 않게 채워진다. 문제는 헛된 욕망이다. 명예와 부에는 천장이 없다. 더 오를수록 기준만 높아지고, 결코 '이만하면 됐다'에 닿지 못한다. 가장 집요하게 마음에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이 끝없는 욕망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의 정원(Kēpos)은 소박했다. 기원전 4세기 말 아테네에 세운 이 공동체는 여성과 노예에게도 문을 열었고, 거창한 향락 대신 우정과 대화를 나눴다. 그는 우정을 두고 "지혜가 복된 삶을 위해 마련해 주는 것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 적었다(『주요 교설』 27번). 마음의 평온은 더 많이 소유해서가 아니라, 곁의 사람과 소박한 충족 속에서 온다고 본 것이다.
우리의 쾌락 쳇바퀴
에피쿠로스의 통찰은 2,300년이 지난 지금 더 또렷하게 들린다. 심리학에는 '쾌락 적응(hedonic treadmill)'이라는 말이 있다. 연봉이 오르면 곧 그 수준이 새 기준선이 되고, 새 휴대폰을 사면 머지않아 다음 모델이 눈에 들어온다. 더할수록 만족의 기준만 위로 올라가, 우리는 같은 자리를 달리는 쳇바퀴 위의 사람이 된다. 에피쿠로스의 언어로 옮기면, 끝없는 '움직이는 쾌락'을 좇느라 '머무는 쾌락'에는 끝내 닿지 못하는 상태다.
밤늦게 침대에 누워 끝없이 화면을 내리는 손가락, 남들의 휴가 사진을 보며 솟는 조바심(FOMO), 다음 알림을 기다리는 마음. 모두 채워도 채워도 가시지 않는 동요다. 자극의 양을 늘리는 방향으로는 결코 잔잔해지지 않는다. 에피쿠로스의 처방은 방향을 거꾸로 튼다. 평온은 더 가져서 오는 게 아니라, 헛된 욕망과 헛된 공포를 빼서 온다.
세네카는 에피쿠로스의 정원 문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다고 전한다. "손님이여, 여기 머무는 것이 좋으리라. 여기서는 쾌락이 최고의 선이다"(『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21번). 정작 그 정원에서 손님에게 내놓은 것은 보리빵과 물이었다. 정원이 약속한 쾌락은 진수성찬이 아니라, 더 바랄 것이 없어 마음이 잔잔해지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늘 마음이었다. 에피쿠로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자극의 정점이 아니라, 물결이 멎은 수면이었다. 그곳의 이름이 아타락시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