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 소남(所南)과 판교(板橋) 이후에, 석파(石坡)와 완당(阮堂)과 원정(園丁) 이후에 동아(東亞)에 묵란의 명인이 없다고 나의 스승 무위당(无爲堂) 선생이 말씀하셨는데 그 까닭을 몰랐더니 오늘 가만히 생각하니 그것이 장엽(長葉)의 표연(飄然)에 있고, 종국엔 흉중의 포한(抱恨)에 있더라. 한 없이 표연장엽 없으니.
일산에서 지하.

김지하 난에 대한 비평적 증언 / 유홍준(영남대 교수)

지하형의 난초 그림은 화법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의 난초 그림은 <사군자 화보> 같은 난보(蘭譜)를 임모(臨摹)하는 것이 아니라 흉중(胸中)의 난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난초가 난의 고귀함이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잡초 같은 단엽난(短葉蘭)으로 민중의 풋풋한 삶을 반영해낸 정신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하 난은 스승의 그것과 달리 처음부터 장엽난을 추구하였다. 그는 한 가닥 또는 두 가닥의 긴 난초잎이 혹은 뻗어 올라가고 혹은 율동적으로 휘날리는 모습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정신적 가치를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것은 유려한 아름다움일 수도 있고, 외로움·그리움·희망·의지 같은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고, 균형·질서·조화 또는 불균형·무질서·혼돈에 대한 성찰인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하의 난은 형상적 상징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
- 「사색과 시정 그리고 미의 율려 律呂」, 전시도록 중에서

김지하 시에 대한 짧은 생각 / 신경림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잠시 나와 있을 때 다른 몇 편의 시와 함께 신문에 발표한 <타는 목마름으로>를 읽던 때의 감동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로 시작되는 이 시를 읽자 나는 온몸이 떨렸다. 사무실에 나와 앉았지만 손이 굳어 펜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한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현상을 얘기했더니 그는 그 시를 읽고 너무 흥분해서 면도를 하다가 살갗을 베었다고 고백했다. 수염이 빳빳하게 서서 영 면도발이 받지 않더라는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 후배와 그날 저녁 늦도록 술을 마시면서 김지하 시를 얘기하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중략) 내 최근의 사는 재미 중의 하나는 띄엄띄엄 발표되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의 사상 속을 여행하는 일이다. 더러는 넓고 환한 벌판이기도 하다가 더러는 길고 어두운 골짜기이기도 한 그의 사상 속을. 그의 시세계는 무한히 깊고 또 넓어, 나는 그의 시 속에서 때로 미아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