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름다운 문장이 가장 위험한 무기일 때가 있다
아름다운 문장이 가장 위험한 무기일 때가 있다.
『롤리타』의 화자 험버트 험버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사랑 이야기로 서술한다. 그는 시인의 언어를 쓴다. 운율을 맞추고, 두운을 굴리고,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섞어가며 자신의 욕망을 신화로 승격시킨다. 소설은 그가 감옥에서, 재판을 앞두고, 배심원단을 향해 쓰는 진술서라는 형식을 취한다. 그는 독자를 배심원석에 앉힌다. 그리고 변론을 시작한다.
문제는 그 변론이 지독하게 설득력 있다는 것이다. 문장이 아름다우면 그 문장이 말하는 사건도 아름다워지는가. 언어가 정교하면 그 언어 뒤에 있는 실제 인물의 고통은 흐려지는가. 나보코프(Vladimir Nabokov, 1899~1977)가 1955년에 던진 이 질문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답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지금 더 절박한 질문이 되었다.
여기서 시작한다.
2. 이름을 빼앗는 문장 — 돌로레스에서 롤리타로
소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폭력은 신체적인 것이 아니다. 언어적인 것이다. 험버트는 열두 살 소녀 돌로레스 헤이즈(Dolores Haze)를 만나자마자 그녀를 "롤리타"라고 다시 이름 짓는다. 돌로레스는 그녀 자신의 이름이다. 롤리타는 험버트가 만든 이름이다. 그 순간부터 소설에 등장하는 것은 돌로레스가 아니라 험버트의 머릿속에서 조립된 "롤리타"라는 이미지다.
이 재명명은 사소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다. 소설 전체에서 진짜 돌로레스—학교 숙제를 미루고, 껌을 씹고, 만화책을 좋아하고, 밤마다 우는 평범하고 구체적인 소녀—는 험버트의 화려한 문장 사이로 아주 잠깐씩만 비친다. 나머지 모든 페이지는 "롤리타"라는 험버트의 창조물이 차지한다. 독자는 소설을 읽는 내내 실제 인물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덧씌운 이미지를 읽는다.
나보코프는 이 장치를 의도적으로 설계했다. 험버트의 문장이 아름다울수록, 그 문장에 가려진 돌로레스의 실재는 더 깊이 묻힌다. 독자가 이 사실을 알아채는 것—그것이 이 소설이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독서 행위다.
3. 레비나스 — 타자의 얼굴은 대상화될 수 없다
이 재명명의 폭력을 철학적으로 정확히 짚어낸 것이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의 타자(l'Autrui) 철학이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Totalité et Infini, 1961)에서 윤리학이 존재론보다 먼저라고 주장한다. 서양철학은 오랫동안 존재란 무엇인가를 먼저 묻고, 그다음에 타인을 그 존재론적 틀 안에 끼워 맞춰왔다. 레비나스는 이 순서를 뒤집는다. 타인의 얼굴(visage)과 마주치는 순간, 나는 어떤 개념화보다 먼저 윤리적 명령을 받는다. "너는 나를 죽이지 말라"는 명령이 얼굴 자체에서 나온다. 타인의 얼굴은 내가 소유하거나 이해로 완전히 포섭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나의 이해를 초과한다.
험버트가 돌로레스에게 한 일은 정확히 이 레비나스적 윤리의 반대편에 있다. 그는 그녀의 얼굴과 마주하는 대신, 그녀를 "님펫(nymphet)"이라는 자신이 만든 유사-과학적 범주 안에 가두었다. 그녀의 얼굴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한 인간으로서의 존중—을 그는 듣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녀를 자신의 판타지 체계 안의 한 항목으로 환원했다. 레비나스의 언어로 말하면, 그는 타자(l'Autre)를 동일자(le Même)로 흡수해버렸다. 이것이 폭력의 철학적 정의다. 상대를 나의 개념 안에서만 존재하게 만드는 것.
4. 칸트 — 인간을 수단으로만 대우하지 말라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윤리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에서 정언명령의 한 형태를 이렇게 제시한다. 인간성을, 너 자신의 인격에서든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만 대우하지 말라.
험버트의 서술을 이 기준으로 읽으면 그의 죄는 더 선명해진다. 그는 자신의 문장 속에서 돌로레스를 소유격으로만 부른다. "나의 롤리타." 이 소유격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욕망과 미적 판타지를 실현하는 도구로만 대우했다. 그녀에게 독립된 목적—자기 삶을 살아갈 권리, 자기 이름을 가질 권리, 자기 미래를 선택할 권리—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문장 차원에서부터 지운다.
흥미로운 것은 험버트 자신도 이따금 이 사실을 안다는 점이다. 그는 스스로를 "괴물"이라 부르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그 자각은 곧바로 다음 문장의 화려한 수사에 묻힌다. 그는 자신의 죄를 안다. 그리고 그 앎을 아름다움으로 덮는다. 칸트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죄를 안다는 사실이, 그 죄를 아름답게 쓸 권리를 주는가.
5. 사르트르 — 시선과 자기기만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에서 자기기만(mauvaise foi)의 구조를 분석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이 책임을 감당하기 싫을 때, 인간은 스스로를 하나의 사물이나 고정된 본질처럼 취급한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서", "운명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라고 말하며 자유로운 선택의 책임을 회피한다.
험버트의 서술 전략이 정확히 이것이다. 그는 자신을 "님펫에 대한 선천적 끌림을 가진 특수한 유형의 인간"으로 서술한다. 마치 그것이 병리학적 진단이나 운명인 것처럼. 그는 자신의 소년기 첫사랑 이야기를 끌어와 자신의 욕망에 기원 서사를 부여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목적을 향한다. 자신이 매 순간 내린 선택—돌로레스를 소유하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와 결혼하고, 어머니가 죽은 뒤 그녀를 데리고 미국을 가로지르며 도피한 선택들—을 마치 피할 수 없는 본성의 발현인 것처럼 재서술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라면 이렇게 진단했을 것이다. 험버트는 자신의 자유를 부인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부인한다. 그리고 그 부인의 도구가 바로 그의 문장이다.
6. 문장이 갈라지는 자리 — 실재가 뚫고 나오는 순간
소설 안에는 험버트의 화려한 수사가 잠시 무너지는 지점들이 있다. 그중 가장 널리 논의되는 장면은, 그가 밤마다 옆방에서—혹은 옆자리에서—돌로레스가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를 듣는다고 인정하는 대목이다. 그는 이 사실을 짧게, 거의 지나가듯 적는다. 그러나 소설 전체에서 이 한 문장만큼 정직한 문장은 없다.
문학평론가 라이어널 트릴링(Lionel Trilling, 1905~1975)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이 이 장면을 소설의 윤리적 핵심으로 꼽는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 순간, 험버트의 미학적 서사 전체가 감당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뚫고 나온다. 돌로레스는 밤마다 울고 있었다. 그녀는 님펫이 아니었다. 신화가 아니었다. 시가 아니었다. 그녀는 매일 밤 우는, 실재하는 한 아이였다.
나보코프는 이 균열을 우연히 남긴 것이 아니다. 그는 정교하게 설계했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340페이지를 채운 뒤, 단 한 문장으로 그 아름다움 전체가 가리고 있던 것을 드러낸다. 이것이 소설의 진짜 기법이다. 독자를 먼저 매혹시키고, 그다음 그 매혹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7. 아이리스 머독 — 사랑은 응시가 아니라 주의다
험버트가 끝내 하지 못한 것을 철학적으로 정의한 사람이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 1919~1999)이다. 머독은 『선의 군림』(The Sovereignty of Good, 1970)에서 도덕적 삶의 핵심을 '주의(atten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주의란 자기중심적인 환상과 투사를 걷어내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실재로서 바라보려는 정의롭고 사랑 어린 노력이다. 머독에게 사랑이란 감정의 격렬함이 아니라, 나 아닌 존재가 진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렵게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험버트는 이 반대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그는 돌로레스를 볼 때마다 자기 자신의 소년기 기억, 자기 자신의 문학적 취향, 자기 자신의 욕망을 그녀 위에 겹쳐 놓는다. 그는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응시(gaze)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응시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 그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상은 돌로레스가 아니라, 돌로레스의 몸을 빌려 상영되는 험버트 자신의 판타지다.
머독의 틀로 보면 이 소설이 그리는 것은 사랑의 실패가 아니다. 사랑이 애초에 시도된 적이 없는 상태다.
8. 플라톤 — 수사학은 진실보다 강할 수 있다
이 모든 문제의 뿌리에는 더 오래된 질문이 있다. 아름다운 말이 진실을 이길 수 있는가.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경)은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소피스트의 수사학을 비판한다. 수사학자는 진실을 몰라도 설득할 수 있다. 오히려 더 약한 주장을 더 강한 주장처럼 들리게 만드는 기술이 수사학의 핵심 능력이다. 플라톤이 시인을 이상 국가에서 추방하려 했던 이유도 여기 있다. 아름다운 언어는 영혼을 진실이 아니라 쾌락 쪽으로 이끌 위험이 있다.
나보코프는 험버트를 통해 이 플라톤적 공포를 소설 형식으로 실연한다. 험버트는 소피스트다. 그의 목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배심원—즉 독자—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공한다. 실제로 많은 독자가 소설을 처음 읽으며 험버트의 문장에 매혹되고, 그다음에야 자신이 무엇에 설득당했는지 깨닫고 불편해진다. 문학이론가 웨인 부스(Wayne Booth, 1921~2005)는 『소설의 수사학』(The Rhetoric of Fiction, 1961)에서 이런 화자를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라 이름 붙였다. 나보코프는 이 기법을 통해 플라톤의 오래된 경고를 20세기 소설의 언어로 되살린다. 아름다움은 진실의 증거가 아니다. 때로는 진실을 가리는 가장 정교한 커튼이다.
9. 지금 여기서 — 매혹적인 서사 뒤에 숨는 것들
『롤리타』가 던지는 질문은 소설 밖에서도 매일 반복된다.
연애 관계에서 상대를 통제하면서도 그것을 '너를 너무 사랑해서'라는 언어로 포장하는 사람이 있다. 직장에서 부당한 지시를 카리스마 있는 화법과 비전 선언으로 감싸는 상사가 있다. 사기성 투자 상품을 세련된 브랜딩과 감동적인 창업 스토리로 포장하는 기업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험버트와 같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해악을 아름다운 언어라는 커튼 뒤에 숨기는 것.
더 아이러니한 사례도 있다. '롤리타'라는 단어 자체가 오늘날 하나의 패션 미학, 하나의 하위문화 코드로 소비된다. 나보코프가 험버트의 언어를 통해 경고하려 했던 바로 그 미화(美化)의 메커니즘이, 소설 밖에서 실제로 일어나 버린 것이다. 비판하려던 대상이 스스로 유행이 되어버리는 이 역설은, 아름다운 서사가 얼마나 쉽게 원래의 맥락과 경고를 지우고 이미지만 남기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씁쓸한 증거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 매혹되는 순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다. 이 아름다움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무엇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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