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춰진 책 한 권이 여섯 명을 죽였다
살인 무기는 독이었다. 그러나 독은 칼이나 밧줄이 아니었다. 독은 책의 페이지에 발라져 있었다. 책장을 넘기려면 손가락에 침을 바른다. 침이 독을 옮긴다. 읽는 행위 자체가 죽음이었다.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 1980)에서 설계한 이 살인 장치는 단순한 추리소설적 트릭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철학적 명제다. 지식은 죽일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지식을 통제하려는 권력이 죽인다.
맹인 수도사 호르헤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추려 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었다. 희극과 웃음에 관한 책. 그는 왜 이 책 한 권을 위해 여섯 명의 목숨을 앗아갔는가. 그리고 그 이유는 정당한가.
이 물음에서 시작한다.
2. 중세의 지식 질서 — 아는 것은 허락받은 것이다
소설의 배경인 1327년은 중세 유럽 지식 질서의 마지막 절정기다. 이 시대에 지식은 민주적으로 유통되지 않았다. 지식은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보존되는 것이었고, 보존의 주체는 교회였으며, 접근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수도원 도서관은 이 질서의 물리적 형태다. 소설 속 도서관은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하지만, 아무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다. 사서만이 어떤 책이 어디 있는지 안다. 어떤 책을 누가 읽을 수 있는지는 사서가 결정한다. 그리고 사서의 권위는 도전받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도서 관리 방침이 아니다. 지식의 위계적 분배 체계다.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알 수 없는지를 결정하는 권력이 있고, 그 권력은 신학적 권위로 정당화된다. 신이 계시한 진리가 있고, 그 진리에 부합하는 지식은 허용되며, 부합하지 않는 지식은 위험하다. 따라서 통제되어야 한다.
이 체계를 철학적으로 분석한 것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지식-권력(savoir-pouvoir) 개념이다.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L'Archéologie du savoir, 1969)과 『담론의 질서』(L'Ordre du discours, 1970)에서 주장한다. 지식은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 어떤 진술이 지식으로 인정받는가, 누가 진리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어떤 주제가 논의 가능한가—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권력이다. 지식은 권력의 효과이고, 권력은 지식을 통해 작동한다.
소설의 도서관은 이 푸코적 지식-권력 체계의 건축적 형상화다. 도서관을 지배하는 자가 지식을 지배하고, 지식을 지배하는 자가 진리를 지배하며, 진리를 지배하는 자가 인간의 영혼을 지배한다.
3. 호르헤의 신학 — 두려움이 진리를 보호한다
호르헤 수사는 단순한 악인이 아니다. 그는 일관된 신학적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논리를 정면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호르헤의 핵심 주장은 이것이다. 웃음은 두려움을 해체한다. 두려움이 없으면 신앙이 무너진다. 신앙이 무너지면 도덕 질서가 붕괴된다. 따라서 웃음을 정당화하는 어떤 권위 있는 텍스트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 논리는 성경적 근거를 갖는다.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가 웃었다는 기록은 없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 상당수는 웃음을 가벼움, 허영, 영적 태만의 표시로 보았다. 6세기 성 베네딕트의 『수도 규칙』(Regula Benedicti)은 수도사들에게 말을 삼가고 웃음을 피하라고 명시적으로 권고한다.
호르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은 이중으로 위험하다. 첫째,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 신학이 최고 권위로 인정하는 철학자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가 그를 단순히 '철학자(il Filosofo)'라고 부를 만큼. 그런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했다면, 그 권위는 압도적이다. 둘째, 희극은 진지한 것을 우스운 것으로 만드는 장르다. 성스러운 것, 두려운 것, 권위 있는 것이 웃음의 대상이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성스럽지도 두렵지도 권위 있지도 않게 된다.
호르헤는 틀리지 않았다. 웃음은 실제로 권위를 해체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막기 위해 살인을 선택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논리로.
4. 웃음의 철학 — 카니발과 전복
호르헤가 두려워했던 웃음의 힘을 철학적으로 가장 깊이 분석한 것은 러시아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 1895~1975)이다.
바흐친은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1965)에서 카니발적 웃음(carnival laughter)의 개념을 제시한다. 중세 유럽의 카니발은 단순한 축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상의 위계질서가 일시적으로 전복되는 공간이었다. 왕이 광대가 되고, 광대가 왕이 된다. 신성한 것이 조롱받고, 천한 것이 높아진다. 죽음이 웃음과 함께 춤춘다.
이 카니발적 웃음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보편성이다. 모든 사람이 웃음에 참여한다. 웃는 자와 웃음의 대상이 분리되지 않는다. 둘째, 양가성(ambivalence)이다. 카니발의 웃음은 순수한 긍정도 순수한 부정도 아니다. 죽음을 비웃으면서 동시에 죽음을 인정한다. 파괴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것을 낳는다. 셋째, 전복성이다. 기존 질서가 웃음 앞에서 일시적으로 무력화된다.
호르헤가 두려워한 것은 정확히 이 세 번째 속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을 진지하게 다루면, 웃음이 철학적 시민권을 얻게 된다. 웃음이 시민권을 얻으면,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 없어진다. 신도, 교황도, 진리도 웃음 앞에 놓일 수 있다. 그리고 웃음 앞에 놓인 것은 더 이상 절대적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883~85)에서 웃음을 긍정의 철학과 연결했다. "나는 웃음을 신성하다고 선언한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무거운 것, 엄숙한 것, 절대적인 것에 대한 웃음은 그것들의 허구적 권위를 폭로한다. 니체의 철학에서 웃음은 허무주의를 넘어서는 힘이다.
호르헤는 이 힘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래서 그것을 죽이려 했다.
5. 윌리엄의 전통 — 오컴의 면도날과 경험론
소설의 탐정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은 실존 인물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 1287~1347경)의 전통에 서 있는 인물이다. 이름의 '바스커빌'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소설 『바스커빌 가의 개』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오컴의 핵심 원리는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다. "필요 이상으로 존재를 늘리지 말라(Entia non sunt multiplicanda praeter necessitatem)." 설명에 필요하지 않은 가정은 잘라내야 한다. 가장 단순한 설명이 가장 좋은 설명이다.
이것은 단순한 논리적 원칙이 아니라 신학적·철학적 선언이다. 오컴은 보편자(universals)가 실재한다는 중세 실재론에 맞서 유명론(nominalism)을 주장했다. '선', '악', '인간' 같은 보편적 개념은 개별 사물들 너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이름일 뿐이다.
이 유명론은 당시 교회 권위에 도전하는 철학이었다. 보편자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선언하는 보편적 진리도 절대적 실재가 아닐 수 있다. 오컴은 실제로 교황청과 충돌하여 파문 위기에 처했고, 루트비히 4세(Ludwig IV)의 보호 아래 도망쳐야 했다. 소설은 이 역사적 맥락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윌리엄이 조사하러 온 수도원 회의는 바로 교황청과 황제파 사이의 정치적 갈등을 배경으로 한다.
윌리엄의 탐정 방법론은 이 유명론적 경험주의에서 나온다. 그는 선험적 원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증거, 발자국, 잉크 흔적, 손가락 색깔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증거들로부터 잠정적 가설을 세운다.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재 가용한 증거에 가장 잘 맞는 설명을 찾는 것.
6. 두 인식론의 충돌 — 계시 vs 경험
소설은 결국 두 가지 인식론의 충돌이다.
호르헤는 계시론적 인식론을 대표한다. 진리는 이미 주어져 있다. 성경과 교부들의 저작 안에 진리가 있고,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고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은 이 계시된 진리의 틀 안에서만 허용된다. 그 틀을 흔들 수 있는 것은 위험하다.
윌리엄은 경험론적 인식론을 대표한다. 진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탐구되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과 경험을 통해 세계를 알아가고, 그 앎은 항상 잠정적이며 수정 가능하다. 어떤 권위도 경험적 증거보다 우선할 수 없다.
이 충돌은 단순히 중세와 근대의 충돌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충돌이다. 어떤 텍스트나 이데올로기나 권위가 절대적 진리를 선점하고, 그에 맞지 않는 경험적 증거를 거부할 때—그것은 호르헤의 방식이다. 반면 기존의 믿음을 새로운 증거 앞에서 기꺼이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그것이 윌리엄의 방식이다.
토마스 쿤(Thomas Kuhn, 1922~1996)은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1962)에서 과학의 역사가 선형적 진보가 아니라 패러다임의 교체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기존 패러다임은 자신에 불편한 증거를 최대한 소화하려 하고, 그것이 한계에 달할 때 혁명적 전환이 일어난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 책을 감춘 것은 기존 패러다임이 자신을 위협하는 증거를 제거하려는 몸짓이다. 그러나 그 제거는 패러다임을 지킬 수 없다. 진리는 감출 수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7. 이단과 정통 — 경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소설의 배경에는 당시 교회를 뒤흔들었던 이단 논쟁이 있다. 프란체스코회 내부의 청빈 논쟁, 돌치노파의 반란, 베가르파와 같은 이단 운동들. 소설 속에서 이단자로 몰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단(heresy)과 정통(orthodoxy)의 경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에코는 이 물음을 소설 안에서 끊임없이 제기한다. 이단자들은 대부분 진리를 더 순수하게 추구하다가 이단이 된 사람들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t. Francis of Assisi, 1181~1226)의 청빈 정신을 철저하게 따르려 한 프란체스코회 영성파(Spirituals)는 교황청과 충돌하여 이단으로 선포되었다. 그들의 죄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재산을 소유했는지 여부를 주장한 것이었다.
이 아이러니를 푸코의 언어로 표현하면 이렇다. 이단과 정통의 구분은 진리의 기준이 아니라 권력의 기준으로 결정된다. 어떤 주장이 당시 지배적 권력 구조를 위협하느냐 지지하느냐에 따라 이단이 되거나 정통이 된다. 진리의 내용보다 권력관계가 먼저다.
소설에서 이것은 구체적 인물로 형상화된다. 돌치노파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살바토레는 무지하고 혼란스러운 인물이지만, 그 혼란 안에서 순수한 무언가를 추구했다. 반면 그를 이단으로 처벌하는 종교재판관 베르나르 기는 냉혹하고 지적이지만, 그 지성은 권력의 도구로만 작동한다. 누가 더 진리에 가까운가.
8. 도서관의 불길 — 파괴할 수 없는 것
소설의 끝에서 도서관은 불탄다. 호르헤가 책들에 불을 지르고, 불은 수도원 전체로 번진다. 유럽 최대 규모의 도서관, 수천 년의 인류 지식이 담긴 그 공간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다.
이 파국적 결말은 여러 층위로 읽힌다.
첫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알레고리다.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은 고대 세계의 지식이 집결된 곳이었고, 화재로 소실되었다. 인류의 가장 비극적 지식 손실 중 하나로 꼽힌다. 에코는 이 역사적 비극을 소설 안에서 반복시킨다. 지식은 취약하다. 물리적 형태로 존재하는 한, 파괴될 수 있다.
둘째, 권력에 의한 지식 파괴의 역사다. 책을 불태우는 것은 역사 속에서 반복된 행위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나치의 분서(焚書), 탈레반의 유물 파괴. 호르헤가 책을 감추고 독을 발랐다면, 그 논리의 끝은 이 불길이다. 지식이 위험하다면,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파괴다.
셋째, 허무와 지속의 역설이다. 도서관은 타지만, 윌리엄의 기억은 남는다. 아드소의 기억은 남는다. 그리고 에코의 소설이 남는다. 물리적 텍스트는 소멸하지만, 텍스트가 담고 있던 생각은 다른 형태로 살아남는다. 지식을 파괴하려는 권력은 항상 이 역설에 부딪힌다. 생각은 책과 함께 타지 않는다.
9. 아드소의 귀환 — 노인이 된 제자의 회상
소설은 아드소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그는 이 사건을 경험할 당시 젊은 수련 수사였고, 소설을 서술하는 현재 그는 노인이다. 수십 년이 지난 뒤, 그는 타버린 수도원 터를 다시 찾는다. 잿더미 속에서 책의 파편들을 주워 모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라틴어 구절들, 탄 페이지의 단편들.
이 장면은 단순한 감상적 마무리가 아니다. 아드소가 수집하는 텍스트의 파편들은 해석 불가능하다. 맥락이 없다. 어느 책의 어느 부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모은다. 의미를 알 수 없어도, 그것들이 한때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보존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1940)에서 제시한 이미지와 공명한다. 베냐민은 역사가의 임무를 과거의 파편들을 구제하는 것으로 보았다. 승자의 역사에서 지워진 패자의 기억, 파괴된 것들의 흔적을 현재 안에서 소환하는 것. 아드소가 타버린 도서관의 잿더미에서 책 파편을 줍는 행위는 이 베냐민적 몸짓이다.
10. 지금 여기서 — 지식의 민주화와 새로운 호르헤들
소설이 출판된 1980년 이후 세계는 극적으로 변했다. 인터넷이 등장했고, 디지털 텍스트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지식에 대한 접근이 유례없이 민주화되었다. 호르헤가 지키려 했던 도서관의 독점적 지식 통제 체계는 원칙적으로 붕괴했다.
그런데 새로운 호르헤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칼을 들지 않는다. 대신 알고리즘을 통제하고, 플랫폼 정책을 설계하며, 검색 결과를 조정한다. 어떤 정보가 유통되고 어떤 정보가 차단되는지를 결정하는 새로운 사서들이 있다. 그들의 도서관은 물리적 탑이 아니라 서버 팜이고, 그들의 비밀 구역은 알고리즘의 블랙박스다.
호르헤의 논리는 변하지 않았다. 어떤 지식은 위험하므로 통제되어야 한다. 그 통제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통제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에코는 이것을 이미 보았다. 도서관의 불길 속에서 웃음에 관한 책이 타는 것을 바라보면서. 웃음이 타면 두려움이 남는다. 두려움이 남으면 권력이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웃어야 한다. 그것이 호르헤들에 대한 가장 오래된 철학적 저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