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X철학
  • 『좁은 문』
  • 사랑인가, 자기기만인가 — 금욕·순교·욕망의 철학
  • 앙드레 지드



  • 1. 그녀는 왜 사랑을 거부했는가

    알리사는 제롬을 사랑했다. 제롬도 알리사를 사랑했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리사는 끝내 제롬의 곁으로 오지 않았다. 결혼을 거부했고, 만남을 피했으며, 마침내 혼자 죽었다.

    앙드레 지드(André Gide, 1869~1951)의 『좁은 문』(La Porte étroite, 1909)은 이 기이한 거부의 이야기다. 사랑받는 여자가 사랑을 밀어내는 이야기. 행복이 가능한데 불행을 선택하는 이야기.

    이것을 단순히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 읽으면 핵심을 놓친다. 알리사의 거부는 단순한 거절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이고, 하나의 윤리이며, 하나의 종교적 실천이다. 그리고 그 세계관은 아름답고 숭고하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깊이 뒤틀린 것이 있다.

    그 뒤틀림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이 에세이의 출발점이다.


    2. 좁은 문 — 성경 속의 은유가 소설을 지배하다

    소설의 제목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왔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험하여 찾는 자가 적다."

    이 구절은 소설 안에서 단순한 모토 이상의 역할을 한다. 알리사의 삶 전체를 구조화하는 원리다. 그녀에게 제롬과의 사랑은 '넓은 문'이다. 그것은 너무 쉽고, 너무 자연스럽고, 너무 행복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심스럽다. 신을 향한 진정한 길은 그렇게 편안할 수 없다고 그녀는 믿는다.

    이 믿음의 구조를 철학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알리사는 쾌락이나 안락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포기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것도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 그녀의 논리에 따르면, 가장 값진 것을 포기해야 진정한 헌신이 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처럼.

    그러나 여기서 이미 균열이 보인다. 아브라함의 시험은 신이 명령한 것이었다. 알리사의 포기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아무도 그녀에게 제롬을 떠나라고 하지 않았다. 신도, 제롬도, 사회도. 오직 알리사 자신만이 그것을 요구했다.


    3. 키르케고르의 세 단계 — 알리사는 어느 단계에 있는가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 1843)와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 1844)에서 인간 실존의 세 단계를 제시했다. 심미적(aesthetic) 단계, 윤리적(ethical) 단계, 종교적(religious) 단계.

    심미적 단계는 순간의 쾌락과 감각적 자극에 몰두하는 단계다. 윤리적 단계는 보편적 도덕 법칙에 따라 살려는 단계다. 그리고 종교적 단계는 이 두 단계를 모두 넘어 신과의 단독적 관계 안에서 사는 단계다. 키르케고르는 종교적 단계에서 때로 윤리조차 '목적론적으로 정지(teleological suspension of the ethical)'된다고 말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한 행위는 윤리적으로는 살인이지만, 신 앞에서는 최고의 신앙 행위였다는 것이다.

    알리사는 스스로 이 종교적 단계에 있다고 믿는다. 그녀의 일기는 신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고, 지상의 행복을 내려놓음으로써 더 높은 것을 향해 간다고 확신한다. 표면적으로 그녀는 키르케고르가 묘사한 '신앙의 기사(knight of faith)'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드는 이 자기 이해에 조용히 의문을 제기한다. 진정한 신앙의 기사는 포기 속에서도 내적 기쁨을 잃지 않는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신앙의 기사는 외면적으로는 평범하고 세속적으로 보이는 사람이다. 반면 알리사는 포기할수록 창백해지고, 점점 고립되며, 그 일기는 점차 자기 파괴적인 색채를 띤다. 무언가가 어긋나 있다.


    4. 욕망의 반전 — 금욕은 욕망의 또 다른 형태인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도덕의 계보학』(Zur Genealogie der Moral, 1887)에서 금욕주의적 이상(ascetic ideal)을 날카롭게 해부했다. 그의 핵심 주장은 역설적이다. 금욕은 욕망의 제거가 아니라 욕망의 전환이다.

    금욕주의자는 삶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삶을 향한 의지를 다른 방향으로 돌린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無)를 원한다.' 그리고 이 무를 향한 의지는 그 자체로 강렬한 욕망이다. 금욕주의자는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욱 강하게 긍정한다. 고통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알리사에게 이 분석을 적용하면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그녀가 제롬을 포기하는 행위 속에는 일종의 황홀경이 있다. 그녀의 일기를 보면, 포기의 고통을 묘사하는 대목들이 가장 문학적으로 고양되어 있다. 그녀는 고통받는 자신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심지어 즐긴다. 니체의 언어로 말하면, 알리사는 금욕을 통해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확인하고 있다. 금욕 자체가 그녀의 욕망이 된 것이다.

    이것은 알리사를 비난하기 위한 분석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복잡하고 자기기만적인지를 보여주는 분석이다. 진심으로 신을 사랑한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그 신앙의 고통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수 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5. 제롬의 실패 —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제롬은 알리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알리사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그녀가 떠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때로 제롬에게 답답함을 느낀다. 왜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가. 왜 알리사의 자기 파괴적 논리에 맞서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은 제롬의 성격적 결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이 제기하는 더 깊은 문제이기도 하다. 제롬은 알리사의 방식대로 알리사를 사랑한다. 알리사가 원하는 것이 금욕이라면,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알리사의 욕망을 제어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알리사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의 분석이 유효해진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Le Deuxième Sexe, 1949)에서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도록 내면화하는지를 분석했다. 그녀가 '자발적 복종'이라고 부른 것이다. 알리사는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내면화한 종교적·윤리적 논리에 의해 스스로를 억압한다. 그리고 이 억압을 자유라고 부른다.

    제롬은 이 메커니즘을 꿰뚫어보지 못한다. 아니, 꿰뚫어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알리사의 금욕적 헌신이 지속되는 한, 제롬은 영원히 그녀의 사랑의 대상이다. 알리사가 그를 떠난 것은 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그에게 묶여 있는 것이기도 하다.


    6. 일기와 자아 — 글쓰기는 진실을 드러내는가 숨기는가

    소설의 후반부는 알리사의 일기로 이루어진다. 지드는 이 구성적 선택을 통해 독자에게 특이한 위치를 부여한다. 독자는 알리사의 가장 내밀한 목소리를 직접 듣게 된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일기라는 장르는 솔직함의 형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정교한 자기 서사화(self-narrativization)의 공간이다. 일기를 쓰는 사람은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독자가 없어도 서술자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를 한다.

    폴 리쾨르(Paul Ricœur, 1913~2005)는 『시간과 이야기』(Temps et récit, 1983~85)와 『타자로서의 자아』(Soi-même comme un autre, 1990)에서 이야기 정체성(narrative identity) 개념을 제시했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자아를 구성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방식이 곧 우리가 누구인지를 만든다.

    알리사의 일기는 이 관점에서 비극적이다. 그녀는 자신을 신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로 이야기하지만, 일기가 진행될수록 그 이야기는 점점 더 공허해진다. 신의 현존은 멀어지고, 남는 것은 고통뿐이다. 알리사가 자신에 대해 구성한 이야기가 실제 삶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을 독자는 보지만, 알리사는 보지 못한다. 혹은 보면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7. 지드 자신의 이야기 — 자전적 맥락과 비판적 거리

    『좁은 문』은 지드의 가장 개인적인 소설이다. 알리사의 모델은 지드의 사촌이자 평생의 사랑인 마들렌 롱도(Madeleine Rondeaux)다. 지드는 마들렌을 깊이 사랑했고, 마들렌도 지드를 사랑했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기묘하게 금욕적이었다. 마들렌은 지드와의 육체적 관계를 거부했고, 지드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지드의 다른 성적 지향(그는 동성애자였다)도 이 관계의 복잡성을 더했다.

    그러나 지드는 소설에서 자전적 사실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그는 알리사를 통해 마들렌을 이해하려 했지만, 동시에 알리사의 논리를 해부하고 비판했다. 소설은 알리사를 숭고하게 그리면서도, 그 숭고함이 어떻게 자기기만과 자기 파괴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이 이중적 시선이 소설을 단순한 추모가 아닌 탐구로 만든다. 지드는 마들렌/알리사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의 방식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끝내 의문을 품었다. 그 의문이 소설에 깃들어 있다.

    지드의 또 다른 걸작 『좁은 문』과 거의 동시대에 씌어진 『배덕자』(L'Immoraliste, 1902)는 완전히 반대편에서 같은 문제를 다룬다. 『배덕자』의 주인공 미셸은 알리사와 반대로, 모든 도덕적 제약을 벗어던지고 순수한 감각과 자아의 해방을 추구한다. 지드는 두 소설을 통해 금욕과 방종, 절제와 해방이라는 양극단을 각각 탐구하면서, 어느 쪽도 단순히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8. 장세니즘의 그림자 — 프랑스 종교의 역사적 맥락

    알리사의 신앙이 단순히 개인적 기벽이 아닌 이유가 있다. 그녀의 종교적 태도에는 17세기 프랑스를 휩쓸었던 장세니즘(Jansenism)의 그림자가 있다.

    장세니즘은 코르넬리우스 얀센(Cornelius Jansen, 1585~1638)의 신학에서 비롯된 운동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과 예정설을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인간은 원래 타락했고,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신의 은총에 달려 있다. 이 은총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 그리고 그 공포에서 비롯된 금욕과 엄격한 자기 규율이 장세니즘의 핵심 정서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이 장세니즘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였다. 그의 『팡세』(Pensées, 사후 출판 1670)에 나오는 유명한 '내기(wager)' 논증도 이 구원의 불확실성에서 나온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내기를 걸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이 없을 때 잃는 것보다 신이 있을 때 잃는 것이 더 크기 때문이다.

    알리사의 삶은 이 파스칼적 내기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그녀는 지상의 사랑을 걸고 천국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파스칼이 보지 못한 것을, 지드는 본다. 내기를 거는 자가 그 내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소진할 때, 내기의 대상이 되는 신도 점점 실체를 잃어간다는 것.


    9. 죽음의 결말 — 순교인가 자기 파괴인가

    알리사는 죽는다. 혼자, 외딴 요양원에서, 젊은 나이에. 그녀의 죽음은 소설 안에서 직접 묘사되지 않는다. 제롬은 나중에 그 사실을 전해 듣는다. 그리고 알리사의 일기를 손에 넣는다.

    이 죽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알리사 자신은 아마도 그것을 완성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좁은 문을 통과한 것이라고. 지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신에게 나아간 것이라고.

    그러나 독자의 시선은 다르다. 알리사의 마지막 일기 항목들은 신의 현존보다 신의 침묵에 대한 증언이다. 그녀가 평생 추구해온 신비적 합일은 오지 않았다. 남은 것은 텅 빈 기도와 쇠약해진 몸이다.

    철학자 레옹 셰스토프(Lev Shestov, 1866~1938)는 키르케고르론에서, 진정한 신앙은 이성을 넘어서는 도약이지만 그 도약의 결과가 허무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직시했다. 알리사의 이야기는 이 가능성의 구체적 형상화다. 신앙을 향한 도약이 신에게로 이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도약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도달해야 할 곳은 사라진다.

    알리사의 죽음은 순교이기도 하고 자기 파괴이기도 하다. 지드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참일 수 있음을, 그리고 그 구분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10. 지금 여기서 — 자기계발의 시대에 읽는 알리사

    『좁은 문』이 출판된 1909년과 지금 사이에 세계는 많이 변했다. 하지만 알리사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다양한 형태로 번식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계발'과 '자기 관리'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채찍질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더 나은 버전의 자신이 되기 위해 현재의 쾌락을 미루고, 인간관계를 잠시 보류하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미래의 목표를 위한 투자로 만들라고 한다. SNS는 이 자기 단련의 퍼포먼스를 전시하는 무대다. 금욕이 미덕으로, 희생이 성공 서사의 필수 요소로 포장된다.

    알리사는 신을 위해 제롬을 포기했다. 현대인은 '성공'이나 '성장'을 위해 현재의 삶을 포기한다. 대상이 신에서 세속적 목표로 바뀌었을 뿐, 구조는 동일하다. 가장 소중한 것을 지금 당장 누리면 안 된다는 논리. 지금의 행복은 나태이고, 포기가 미덕이라는 논리.

    니체가 금욕주의적 이상을 비판하면서 던진 질문은 오늘도 유효하다. 당신이 포기하고 있는 것은 정말로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포기 자체가 당신의 욕망이 된 것은 아닌가.

    알리사는 사랑받았다. 그리고 그 사랑을 충분히 살지 않았다. 그것이 신앙 때문이었는지, 자기기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둘이 구분 불가능할 만큼 얽혀 있었는지—지드는 대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옳은가. 그리고 그 좁음이 정말로 당신이 선택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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