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버지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아버지가 살해되었다. 용의자는 아들이다. 그러나 소설이 끝날 때까지 독자는 이 물음 앞에서 불편하다. 누가 실제로 죽였는가.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물음.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 1821~1881)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1880)은 단순한 가족 범죄 소설이 아니다. 이 소설은 19세기 러시아라는 배경을 빌려 인류 역사상 가장 묵직한 철학적 물음들을 정면으로 들이민다.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왜 세상에 고통이 있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도덕의 근거는 무엇인가.
소설 속 카라마조프 가문의 세 형제—드미트리, 이반, 알료샤—는 각각 하나의 세계관을 체현한다. 그리고 그들의 충돌은 19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가 여전히 끝내지 못한 논쟁의 축소판이다.
2.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 이반의 명제
소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은 이반 카라마조프의 것이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Если Бога нет, то всё позволено)."
이 문장은 이반 자신이 직접 한 말이 아니다. 그의 사상에 감화된 하인 스메르댜코프가 이 논리로 살인을 정당화할 때 등장하는 형태다. 그러나 이 명제의 철학적 원천은 분명히 이반이다.
이반의 논리는 이렇다. 도덕은 절대적 근거가 필요하다. 그 근거는 신일 수밖에 없다. 신이 없다면 도덕의 절대적 근거도 없다. 근거 없는 도덕은 단순한 사회적 관습이거나 개인의 취향이다. 취향은 강제할 수 없다. 따라서 신이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덕 명령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냉소가 아니다. 이반은 악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극도로 도덕적 감수성이 예민한 인물이다. 바로 그 예민함이 그를 신에 대한 반역으로 몰고 간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들이 고통받는 세계를 그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반이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실화에 기반한다. 어린 소년이 영주의 사냥개에게 찢겨 죽은 이야기. 다섯 살 여자아이가 부모에게 학대당해 동상 속에 갇힌 이야기. 이반은 묻는다. "이 아이들의 고통이 미래의 조화와 균형을 위한 재료라면, 나는 그 조화의 입장권을 반납하겠다."
이것은 철학에서 '신정론(theodicy)의 문제'라 불리는 물음이다. 전능하고 선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신정론』(Théodicée, 1710)에서 이 세계가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이반은 그 논리를 어린아이의 눈물 앞에서 산산조각 낸다.
3. 대심문관 — 자유는 인간에게 저주인가
소설 5부에 등장하는 「대심문관」 장은 도스토옙스키가 직접 이반의 입을 빌려 쓴 산문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것을 자신의 문학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페이지라고 했다.
무대는 16세기 세비야. 이단 심판이 한창인 스페인. 그곳에 예수가 다시 나타난다. 민중은 그를 알아보고 몰려들지만, 90세의 노추기경 대심문관이 그를 체포한다. 그리고 그날 밤 독방에서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긴 독백을 쏟아낸다. 예수는 침묵한다.
대심문관의 핵심 논리는 이것이다. 예수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감당할 수 없다. 자유는 인간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다. 인간이 실제로 원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빵이고, 기적이고, 권위다. 그래서 교회가 그 자유를 대신 짊어져 주었다. 교회가 인간에게 복종을 가르치는 것은 인간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대심문관은 묻는다.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를 세 번 유혹했을 때, 그 유혹을 왜 거부했는가.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을 거부함으로써 예수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동시에 굶주림도 주었다. 기적을 보여주는 유혹을 거부함으로써 예수는 믿음의 자유를 주었지만, 동시에 의심의 고통도 주었다. 세상의 왕이 되라는 유혹을 거부함으로써 예수는 각자의 선택을 주었지만, 동시에 책임의 무게도 주었다.
이 대목에서 도스토옙스키가 건드리는 것은 자유의 역설이다. 자유가 진정한 인간의 존엄이라면, 그 자유는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가. 대심문관의 말은 틀렸는가.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훗날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L'homme est condamné à être libre)"고 말했다(『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1946). 이 문장은 대심문관의 논리와 묘하게 겹친다. 사르트르에게 자유는 해방이자 동시에 근원적 불안이다.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선택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대심문관은 이 불안을 보았고, 그래서 자유를 회수하려 했다.
4. 알료샤 — 사랑이 신학보다 강한가
이반이 지성의 반역을 대표한다면, 알료샤 카라마조프는 사랑의 긍정을 대표한다.
알료샤는 지적으로 이반의 논리를 반박하지 못한다. 이반이 제시하는 아이들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는 창백해질 뿐이다. 신정론적 해명도 없고, 철학적 반론도 없다. 다만 그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이반의 절망과 스메르댜코프의 살인과 드미트리의 파멸 사이에서 유일한 대안으로 남는다.
이것은 도스토옙스키가 의식적으로 설계한 배치다. 그는 이반의 논리가 반박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논리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다. 그것을 그는 '살아있는 삶(живая жизнь)'이라고 불렀다. 추상적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의 구체적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알료샤의 스승 조시마 장로는 말한다.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을 죄인으로 여겨라."
이 '적극적 사랑'의 철학은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도덕 철학과 대조를 이룬다.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에서 도덕의 근거를 이성에서 찾았다. 감정과 기울어짐이 아니라 보편적 이성의 법칙. 그러나 도스토옙스키가 제시하는 것은 이성적 도덕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도덕이다. 조시마 장로의 말을 빌리면, "사랑은 능동적인 것이어야 한다. 사랑은 행위여야 한다."
5. 드미트리의 수난 — 죄책감과 구원의 변증법
맏형 드미트리는 열정적이고 충동적이며 자기모순적인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돈을 탕진하고, 여자에 집착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그러나 아버지를 실제로 죽인 사람은 드미트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시베리아 유형을 받아들인다.
이 역설적 수용이 소설의 핵심 중 하나다. 드미트리는 자신이 죄없이 벌받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벌받는 것이 옳다고 느낀다. 왜인가. 그는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죽이지 않았을 뿐이지, 살인의 의지는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그는 자신이 러시아 민중의 죄를 함께 짊어지는 것이라고 느낀다.
이것은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폿킨(Peter Kropotkin)이나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와는 다른 방향의 러시아적 사유다. 집단적 죄책감, 고통을 통한 정화, 수난을 통한 새로운 탄생. 도스토옙스키는 이것을 러시아 정교회의 신학적 전통 안에서 이해했다. 죄 없이 고통받는 것이 죄인처럼 고통받는 것보다 더 높은 영적 상태라는 역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1928년에 쓴 논문 「도스토옙스키와 아버지 살해」(Dostojewski und die Vatertötung)에서 이 소설을 아버지 살해의 욕망과 억압, 죄책감의 문학으로 읽었다. 프로이트에게 드미트리의 수난 수용은 억압된 살인 욕망에 대한 무의식적 자기처벌이다. 이 독해는 매혹적이지만, 도스토옙스키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좁은 해석이기도 하다.
6. 스메르댜코프 — 논리가 낳은 괴물
스메르댜코프는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사생아다. 어리석은 여인에게서 태어났다고 알려진 하인. 그는 간질병이 있고 감정이 빈약하며 교양과 지성을 동경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반의 사상을 듣고 그것을 철저하게 실행에 옮긴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논리로 표도르를 살해한다. 그리고 이반에게 말한다. "당신이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충격적인 철학적 고발이다. 추상적 지성의 결론이 구체적 폭력으로 실현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반은 자신이 살인을 교사할 의도가 없었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스메르댜코프의 존재는 그 항변을 무력화한다. 어떤 사상이든, 그것이 현실에 어떤 결과를 낳는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논했다.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 스메르댜코프는 이 평범한 악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는 철학적 논리를 수행했을 뿐이다. 그 논리의 끝에 살인이 있었다.
이반은 스메르댜코프를 만난 후 정신이 무너진다. 그는 환각을 보기 시작한다. 그의 내면에서 악마가 출현한다. 악마는 이반 자신이 가장 믿고 싶지 않은 것들을 믿을법하게 들려준다. 이 장면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니체보다 먼저 허무주의의 심연을 그렸다.
7. 조시마 장로의 철학 — 상호 책임과 대지의 신학
소설에서 이반의 반역에 대응하는 가장 깊은 목소리는 조시마 장로다. 그는 알료샤의 스승이며 수도원의 원로 수사다. 그의 가르침은 체계적 신학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조시마의 핵심 사상은 두 가지다. 첫째,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이 저지르는 악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다. "우리 모두는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나는 다른 누구보다 더 책임이 있다." 둘째, 대지를 사랑하라. 추상적 인류가 아니라 흙을, 나무를,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이것은 독일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의 나-너(Ich-Du) 철학을 선취한다. 부버는 『나와 너』(Ich und Du, 1923)에서 인간의 관계를 두 가지로 나눈다. 대상으로서의 관계(나-그것)와 전인격적 만남으로서의 관계(나-너). 조시마가 말하는 사랑은 부버적 의미의 나-너 관계다. 상대를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그의 존재 전체와 만나는 것.
조시마 장로의 죽음 이후 그의 시신에서 악취가 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성인은 죽어도 향기를 발한다는 민간 신앙이 있었다. 그런데 조시마의 시신은 빠르게 부패한다. 이것은 이반의 사상을 지지하는 수도사들에게 하나님이 조시마를 버린 증거처럼 읽힌다. 그러나 알료샤에게 이 사건은 오히려 더 깊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성스러움은 부패하지 않는 시신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랑 안에 있다는 것.
8. 이반의 악몽 — 허무주의의 자기 파괴
이반 카라마조프는 소설의 지적 정점이다. 그는 논리적으로 완벽하다. 그의 논증은 도스토옙스키가 의도적으로 반박하지 않은 채 남겨두었다고 스스로 밝혔을 만큼 강력하다.
그러나 소설 후반부에서 이반은 무너진다. 스메르댜코프가 자신의 논리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는 환각 속에서 악마와 대화한다. 이 악마는 낡고 초라하며 평범한 신사로 나타난다. 그는 이반의 사상을 반복하고, 이반의 논리를 인정하며, 그러면서 이반을 조롱한다.
이 장면의 핵심은 이것이다. 논리의 완벽함이 삶의 견고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반의 지성은 무한히 날카롭지만, 그 날카로움이 결국 자신을 베는 칼이 된다. 신 없는 세계에서의 절대적 자유라는 개념은, 그것을 끝까지 밀고 갈 때 삶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반항인』(L'Homme révolté, 1951)에서 이반 카라마조프를 현대적 반항의 원형으로 읽는다. 이반의 신에 대한 거부는 단순한 무신론이 아니라 도덕적 반항이다. 신이 이런 세계를 만들었다면, 나는 그 신을 거부한다. 카뮈는 이 반항을 인간의 존엄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동시에 반항이 허무주의로 귀결될 위험도 보았다. 이반의 붕괴는 그 위험의 문학적 형상화다.
9. 소설의 형식 — 다성악(Polyphony)과 열린 결말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 1895~1975)은 『도스토옙스키 시학의 문제들』(Проблемы поэтики Достоевского, 1963)에서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형식적 특징을 '다성악(polyphony)'으로 규정했다.
바흐친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는 지배적인 단일한 목소리가 없다. 작가의 목소리도 다른 목소리들을 압도하지 않는다. 이반의 목소리, 알료샤의 목소리, 드미트리의 목소리, 조시마의 목소리가 각각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 채 공존하고 충돌한다. 독자는 어느 하나의 목소리가 최종 진리라고 결론 내릴 수 없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기법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 태도다. 진리는 단일한 목소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진리는 복수의 목소리들이 충돌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드러난다. 혹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소설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 소설을 완성하고 두 달 후 세상을 떠났다. 그가 계획했던 속편은 쓰이지 않았다. 알료샤가 어떻게 되었는지, 드미트리가 유형지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소설은 열려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의도된 것일지도 모른다. 철학적 물음은 닫혀서는 안 된다.
10. 지금 여기서 — 이반의 물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 명제는 1880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종교적 권위가 약화된 세속 사회에서 도덕의 근거는 어디서 오는가. 인권, 민주주의, 법치—이 개념들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그것이 단순한 사회적 합의라면, 합의가 바뀔 때 도덕도 바뀌어야 하는가. 다수결로 소수자를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 물음들 앞에서 이반 카라마조프의 논리는 여전히 날카롭다. 그리고 알료샤의 대답도 여전히 유효하다. 논리가 아니라 사랑으로.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 인간으로. 그것이 충분한 답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그것 외에 다른 답을 알지 못했다. 아마도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료샤는 이류샤의 장례를 마친 아이들에게 말한다. "우리가 어떤 좋은 사람이 될 때, 우리가 어떤 훌륭한 일을 할 때—우리는 이 순간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말은 거창한 신학도, 정교한 철학도 아니다. 그냥 지금 여기서의 약속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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