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발의 총성이 모든 것을 묻는다
키릴로프는 새벽에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광인도 아니었다. 그는 철학자였다. 그리고 그의 자살은 철학적 결론이었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신이 없다면 인간은 자유의지의 주인이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스스로 죽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행위로서의 자살—이것이 키릴로프의 철학이다. "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죽는다."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 1821~1881)가 『악령』(Бесы, 1872)에서 설계한 이 장면은 단순한 소설적 충격이 아니다. 그것은 19세기 유럽을 뒤흔든 허무주의(nihilism)의 철학적 귀결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형상화한 것이다.
신이 죽으면 무엇이 오는가. 자유가 오는가, 아니면 심연이 오는가. 『악령』은 이 물음을 다섯 개의 인간 유형으로 나누어 실험한다. 그리고 그 실험의 결과는 처참하다.
2. 악령이란 무엇인가 — 제목이 이미 선언이다
소설 제목 『악령』(Бесы, Bésy)은 신약성서 누가복음 8장의 에피소드에서 온다. 예수가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악령들을 쫓아내자, 악령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고 돼지들은 호수로 뛰어들어 익사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성경 구절을 소설 서두에 에피그래프로 인용하면서, 자신의 작품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미리 선언한다.
악령은 돼지들에게 옮겨 들어간다. 그리고 돼지들은 호수로 달려가 빠져 죽는다. 소설 속 러시아 혁명가들이 바로 이 악령에 사로잡힌 돼지들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시각에서, 신을 부정하고 허무주의와 혁명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1860~70년대 러시아 급진 지식인들은 자기 파멸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이 소설은 실제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1869년 혁명가 세르게이 네차예프(Sergei Nechaev, 1847~1882)가 이끄는 비밀결사가 단원 이반 이바노프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네차예프는 『혁명가의 교리문답』(Катехизис революционера, 1869)에서 혁명의 대의를 위해 모든 도덕을 폐기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사건을 소설에 옮겨와 소설 속 살인자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를 만들었다.
그러나 소설은 단순한 정치 팸플릿이 아니다. 그것은 신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는가에 관한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3. 스타브로긴의 공백 — 카리스마와 허무
소설의 중심에는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이 있다. 그는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다. 귀족 출신에 뛰어난 지성, 압도적인 육체, 모든 사람을 끌어당기는 카리스마.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게 종속되어 있다.
그런데 스타브로긴에게는 결정적인 공백이 있다. 그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키릴로프에게는 한때 무신론의 철학을 심어주었고, 샤토프에게는 러시아 민족과 신앙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며, 다른 인물에게는 또 다른 이념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 어떤 것도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
이 공백이 스타브로긴의 본질이다. 그는 이념을 유통시키지만 소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불을 지르면서 자신은 차갑게 타오르지 않는 인물. 그 냉기가 결국 그를 자살로 이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에서 부조리(absurdity)의 개념을 제시했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계는 아무런 의미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 간극이 부조리다. 그리고 부조리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철학적 자살(신앙을 통한 도약), 물리적 자살, 또는 부조리와 함께 사는 반항. 스타브로긴은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한다. 그는 부조리를 인식하면서도 그것과 씨름할 의지조차 없다. 그 무의지가 그를 죽인다.
4. 키릴로프의 논리 — 자유의 극한으로서의 자살
키릴로프는 『악령』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정교하게 구성된 인물이다. 그의 자살론은 단순히 '삶이 싫다'는 감정적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완결된 철학 체계다.
논리를 따라가보면 이렇다. 인간이 사는 이유는 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이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사는 이유도 없다. 그러나 키릴로프는 여기서 허무주의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전진한다. 신이 없다면, 인간 자신이 신이 되어야 한다. 신이 된다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했음을 가장 완전하게 증명하는 것은 자발적 죽음이다. 따라서 자살은 인간이 신이 되는 행위다.
이 논리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의 초인(Übermensch) 개념과 기묘하게 공명한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2)에서 "신은 죽었다(Gott ist tot)"고 선언했다. 그리고 신이 죽은 자리에 초인이 와야 한다고 했다. 초인은 허무주의를 넘어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는 존재다.
그런데 키릴로프는 그 논리를 뒤집어버린다. 그는 신의 죽음에 동의하지만, 그 귀결로 자신이 신이 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죽음을 통해 신의 부재를 증명하려 한다. 니체가 삶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허무주의를 넘으려 했다면, 키릴로프는 죽음을 통해 허무주의를 완성하려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신 없는 세계의 논리가 어디로 귀결되는지를 키릴로프를 통해 보여준다. 그 귀결점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5. 표트르 베르호벤스키 — 이념을 도구로 쓰는 자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는 소설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키릴로프나 샤토프처럼 진지하게 이념을 믿지도 않고, 스타브로긴처럼 공허한 카리스마를 풍기지도 않는다. 그는 이념을 순수하게 도구로 사용한다.
그는 혁명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열망 때문이 아니다. 혁명은 혼돈이고, 혼돈 속에서 권력을 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원들을 서로 감시하게 만들고, 공동 살인에 참여시켜 공범 관계를 만들어 이탈을 막는다. 조직은 이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위해 존재한다.
이 구조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에서 분석한 전체주의 운동의 구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전체주의 운동은 이념을 내세우지만, 실제로 이념은 조직을 결속시키는 껍질에 불과하다. 운동의 목적은 이념의 실현이 아니라 운동 자체의 지속과 확장이다. 이념은 수단이고, 권력이 목적이다.
더 섬뜩한 것은 표트르가 스타브로긴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는 스타브로긴을 자신의 혁명 운동의 상징적 우두머리로 세우려 한다. 대중은 이념보다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따른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안다. 이념보다 이미지가, 논리보다 신화가 더 강력하다. 현대 정치에서 포퓰리즘이 작동하는 방식이 여기 있다.
6. 샤토프의 선택 — 민족과 신앙이라는 대안
샤토프는 스타브로긴의 그늘에서 벗어나 러시아 민족 정신과 그리스도 신앙으로 귀환하려는 인물이다. 그는 한때 허무주의와 무신론에 빠졌다가 돌아선 자다.
샤토프의 주장은 도스토옙스키의 목소리에 가장 가깝다. 민족은 단순한 혈연 공동체가 아니다. 민족은 신과 맺는 관계의 방식이다. 각 민족은 고유한 방식으로 신을 섬기고, 그 신앙 속에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러시아 민족의 신은 그리스도이고, 러시아는 그리스도를 세계에 전하는 사명을 가진 민족이다—이것이 샤토프의 신념이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샤토프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샤토프는 살해당한다. 그리고 살해당하기 전날 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아내가 돌아와 아이를 낳는다. 샤토프는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님을 알면서도 깊은 사랑으로 품는다. 이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허무 속에서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을 향한 무조건적 사랑.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곧 살인으로 덮인다. 도스토옙스키는 단순한 낙관적 결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신앙과 사랑이 아름답다고 해서 현실의 악령들이 물러가지는 않는다.
7. 스테판 베르호벤스키 — 구세대 자유주의자의 파산
표트르의 아버지 스테판 베르호벤스키는 1840년대 자유주의 지식인 세대를 대표한다. 그는 프랑스 문화를 숭배하고, 러시아의 미개함을 한탄하며, 서구적 이념과 자유를 열정적으로 설파했다. 그러나 그는 삶 전체를 바르바라 스타브로기나의 재정 지원 아래 기생적으로 살아왔다.
도스토옙스키는 스테판을 통해 날카로운 세대 비판을 가한다. 1840년대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이념적 유희를 즐기는 동안, 그 이념은 아들 세대에서 극단화되어 진짜 폭력으로 나타났다. 아버지의 유미주의적 허무주의가 아들의 테러주의적 허무주의를 낳은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세대를 건너 나타난다.
이것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변증법적 역사 개념과 연결된다. 헤겔은 『역사철학강의』(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1837)에서 역사가 정-반-합의 변증법적 운동으로 전진한다고 보았다. 한 세대의 이념은 그 모순을 내포하고 있고, 다음 세대가 그 모순을 극단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새로운 단계가 열린다. 스테판의 온건한 회의주의가 표트르의 냉혹한 테러리즘을 낳는 것은 이 변증법적 과정의 문학적 형상화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스테판은 뉘우침의 방랑길을 떠나고, 민중 속에서 죽는다. 그것은 도스토옙스키가 그에게 허락하는 마지막 위엄이다.
8. 악령의 구조 — 이념이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악령』은 1869년 실제 네차예프 사건을 모델로 삼았지만, 그 분석은 훨씬 더 보편적이다. 어떻게 이념이 폭력이 되는가, 어떻게 혁명의 열망이 살인으로 귀결되는가—이 물음은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도 계속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진단은 이것이다. 이념이 인격을 대체할 때 폭력이 시작된다. 표트르 베르호벤스키에게 이바노프는 동료가 아니라 조직의 약한 고리다. 그를 사람으로 보는 순간이 없다. 이념의 논리 안에서 그는 제거되어야 할 장애물이다.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전체성과 무한』(Totalité et Infini, 1961)에서 윤리의 출발점을 타자의 얼굴(le visage de l'Autre)에서 찾는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 얼굴 앞에서 나는 도덕적 책임의 주체가 된다. 레비나스의 언어로 말하면, 표트르가 자행하는 살인의 근본 원인은 타자의 얼굴을 볼 능력의 상실이다. 이념이 얼굴을 가렸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낯설지 않다. 온라인에서 이념적 집단이 개인을 공격할 때, 그 개인은 얼굴이 없는 '적'이 된다. 집단의 논리가 개인의 인격을 덮어버린다.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메커니즘은 같다.
9. 도스토옙스키의 신학 — 신 없는 자유는 자기 파멸이다
『악령』의 근본 주제는 자유(свобода)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에게 자유는 위험한 선물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허무주의자들은 모두 자유를 원했다. 신과 전통과 도덕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 그런데 그 자유가 도달한 곳은 살인, 자살, 파멸이다. 왜인가.
도스토옙스키의 대답은 『카라마조프 형제들』(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1880)의 대심문관 장면에서 더 명확하게 나타나지만, 『악령』에서도 이미 그 윤곽이 보인다. 신 없는 자유는 공허하다. 인간은 의미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자유 그 자체가 의미를 줄 수는 없다. 자유는 무언가를 위한 자유여야 한다. 그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 없는 자유는 방향을 잃은 에너지이고, 방향을 잃은 에너지는 파괴적이다.
이 관점은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실존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1946)에서 신 없는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며, 그것이 인간의 위엄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에 본질을 만든다(existence précède l'essence). 도스토옙스키는 이 낙관적 자율성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만큼 강하지 않다. 홀로 의미를 만들기에 충분히 강한 인간은 없다. 그 자만이 키릴로프를 죽게 만들었다.
10. 지금 여기서 — 악령은 어디로 갔는가
『악령』이 출판된 1872년으로부터 150년이 넘게 흘렀다. 네차예프의 비밀결사는 20세기 볼셰비키 혁명의 먼 조상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에서 경고한 것들은 실제 역사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혁명은 왔고, 대숙청이 왔으며, 수백만이 죽었다.
그렇다면 악령은 사라졌는가. 아니다. 악령은 더 세련된 형태로 돌아왔다.
오늘날의 악령들은 혁명의 언어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알고리즘의 언어를 말한다. 소셜 미디어의 극단적 이념 집단들, 혐오와 분노를 조직화하는 온라인 운동들, 이념의 순수성을 위해 동료를 제거하는 취소 문화(cancel culture)—그 구조는 표트르 베르호벤스키의 비밀결사와 다르지 않다. 조직의 논리가 개인보다 중요하고, 이념의 순수성이 타자의 얼굴보다 우선한다.
그리고 스타브로긴 같은 인물들도 여전히 있다. 카리스마 있는 공허함.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신념의 불을 붙이는 사람들. 그 불이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책임 없이.
도스토옙스키는 신을 잃은 세계의 초상을 그렸다. 그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소설이 『악령』이다. 우리가 그 세계 안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소설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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